▲ 김 명 환 목사

어제(22일)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 할 것인가(?) 아니면 바나바를 선택 할 것인가(?) 빌라도의 법정에 서 있다. 예수님과 빌라도는, 방법은 다르지만 똑같이 이스라엘민족의 해방운동에 참여했다. 예수님은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했고, 바나바는 선동적인 힘에 의한 민족해방운동을 벌였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선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쳤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한복음 18장 28-32절)

정의는 이렇게 늘 상처받고, 아픔을 동반한다. 예수님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는 불의와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불의와 폭력에 맞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작은 자들에 의해서 정의는 지켜졌고, 이들이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들은 정의를 외치며,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사순절 기간인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는 평화를 이야기 하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평화를 말하면서, 힘에 의한 평화, 로마평화를 말한다. 이들은 영지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예수님의 평화를 말하기보다, 로마팍스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모두가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았나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동안 한국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슨 일을 했는가. 한국교회는 시온의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고 살지를 못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와 결탁하며 살았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는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일제의 불의와 폭력 앞에 굴복했고, 심지어 일제의 국가주의에 굴복,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해방이후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하며, 그 주변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특히 한국교회는 독재정권도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며, 이들의 폭력을 용인했다. 폭력에 맞서 정의를 외치는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했다. 심지어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범죄를 저질렀다. 오늘에 와서는 경제보복을 단행한 일본 아베정권을 우방이니, 동맹이니 말하면서 화해하라고 한다.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침략한 침략국이다. 우방도, 동맹도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침략국인 일본과 화해하라고 말하면서, 같은 민족인 북한과는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북한민족의 하나님이며, 세계민족의 하나님이다. 글로벌시대 일본도, 북한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다.

시온의 영광을 바라며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 십자가는 나의 기쁨이며, 영광이다. 우리는 기쁨이며, 영광인 십자가를 거부하며 살지 않았는가. 십자가의 영광과 기쁨을 고백하는 자는 늘 예수님 편에 있는 것이다.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자. 우리가 십자가를 내려놓는 순간 한국교회는 무너진다. 우리모두 십자가를 지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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