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아동문학가 문삼석의 동시 가운데 [그냥]이 있다. <‘엄만 내가 왜 좋아? / -그냥… // 넌 왜 엄마가 좋아? / -그냥…> 어쩌면 사랑은 이렇게 ‘그냥’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이 있다. ‘그냥’ 그곳에 있던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그 많던 이들이 예수를 떠났다. 제자들도 떠났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도망친 이도 있다(막 14:50-52).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했다. 그런데 끝까지 예수 곁에 함께 있은 사람들이 있다. 몇몇 여인들이다. 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은 셋이다. 그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문삼석의 동시처럼 “그냥…”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사실 참된 사랑은 출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죽음을 넘어서까지 삶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예수를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제자들은 무서워서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여인들은 무덤을 찾아갔다. 제자들은 죽은 자를 피해 달아났지만, 여인들은 죽은 자임에도 개의치 않고 가까이 나아갔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그와의 관계도 끝난 것이었지만, 여인들은 예수가 죽었음에도 그와의 사랑에 변함이 없었다. 참 사랑은 이렇게 죽음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생명이나 인격에는 관심이 없고, 허울뿐인 명분과 이용가치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있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명분이 더 우선인 지도자들이 있다. 전쟁과 살상이 왜 일어나는가? 명분 때문이다. 증오 때문이다. 이권 때문이다. 권력 때문이다. 죄악 때문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전개되는 전쟁의 위협에는 자국의 이익 혹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제자들은 이용 가치를 따졌지만, 여인들은 생명 자체,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보살폈다. 제자들에게 예수는 죽음으로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것이었으나, 여인들에게 예수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삶과 그의 인격과 그를 향한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랑의 참 모습이 이러하다. 이와 같은 사랑이 부활의 기적을 낳는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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