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춘(不似春)

사기그릇 부딪는 소리
찌그러진 세숫대야 구르는 소리 나다가도
아침이면 된장국에 몇 가락
김이 올랐다

헤진 작업복으로 온탕 같은 여름과
무릎 서걱대는 가을을 건넨 후
물 바랜 한복을 입고
설날 잠을 청했다

널다리에 얼음 엉겨 붙는 혹한을 지나면
논배미코끝으로 봄은 오리라 여겼는데
개화를 상실한 부엌엔
냉기가 가득하다

고무물통 낡아가는 수돗가
기대(期待)라고 손톱만큼도 자라지 않는
마당을 들어서다 말고
낮달처럼 서있다

 

-시집 『상흔(傷痕)을 꽃으로 여기며』에서
* 이용대 :
조선문학 등단. 한국기독시인협회 이사. 한국기독시 작품상
시집 『처음만난 그날처럼』 등 8권 상재.

▲ 정 재 영 장로
시집 제목처럼 아픔의 흔적을 꽃처럼 여기는, 즉 삶의 흔적을 잘 드러낸 시편이다.

불사춘은 왕소군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구절 호지무화초 (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에서 유래한 말로,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으로, 어떤 처지나 상황이 때에 맞지 않음을 일컫는다. 보통 부정적인 처지를 말할 때 사용한다.

이 시에서 호지는 어딜까. 오랑캐 땅인 타향의 자리는 3연의 부엌 상황에서 단초를 찾는다.

1연을 보면 부엌이거나 분주하고 활기가 서린 마당의 기억이다. 사기그릇 부딪치는 소리란 음식을 준비하면서 생기는 소리, 역시 세숫대야 구르는 소리도 얼굴을 씻는 소리로 현실 장소를 의미한다, 된장국을 만드는 부엌의 변용도 삶의 현장성울 지칭한다. 김이 오르는 음식이 없음을 암시함으로, 현재 상황의 암울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지간히 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 고무통도 동일하다. ‘헤진 작업복’으로 그려진 노동을 ‘무릎 서걱대는 가을’은 건강을, ‘물 바랜 한복’은 경제적 모습을 함축한 은유다. 2~3연의 진술과정을 통해 변하지 않는 삶의 형태가 불사춘임을 고백하고 있다. 심층적으로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리라’ 여겼던 기대 상실의 면이 부엌이다. 부엌엔 ‘냉기가 가득하다’는 말은 음식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부엌에 있어야 할 사람의 부재로 해설함이 타당하다. 음식을 만들어 준 부모님이 아니면 부인의 부재를 암시한다. 앞 연으로 보면 후자로 상상함이 더 타당하다.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행 ‘낮달처럼 서있’는 화자다. 달은 밤의 존재인데, 낮달은 역설적 상징으로, 낮달은 불사춘처럼 때를 벗어난 현상이다. 그래서 해설이 필요 없는, 아니 해설을 하면 도리어 그 정서가 옹색해지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며, 생명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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