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성령을 통해서 실현되어지는데, 믿음을 통해서 받은 것이라는 점이 핵심내용이다. 스위스 개혁진영은 견고한 통일성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취리히와 제네바에서는 점차 교회의 독립권이 허용되어졌으나, 베른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모든 교회업무가 사실상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었으며 특히 교회가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권징을 허용하지 않았다. 베른에서는 츠빙글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요한네스 할러가 루터파에게 가까웠던 스트라스부르 교회 쪽으로 기울었다.

1558년 12월, 로잔의 목회자들은 더 큰 도시인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베른 시당국의 반응은 즉각적인 보복이었다. 복종하겠다는 목회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1559년 2월, 로잔의 모든 개혁교회 목회자들을 직위 해제시켰다. 아카데미에서 원장을 맡아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시키던 삐에르 비레 역시 물러났다. 제네바와 베른은 똑같이 종교개혁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면서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지위가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다.

취리히와 제네바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루터파에 대응방안을 모색했지만, 그 외에 각론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개혁신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제네바에서는 교회 권징과 예정론이 지속적으로 논의가 되었고, 취리히에서는 불링거가 앞장 서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들과 동유럽에 관련된 사항들을 많이 다뤘고, 칼빈은 프랑스어 사용지역의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맺는 말

로마 가톨릭 신부였던 츠빙글리가 모든 오류들을 간파하고 결정적으로 낡은 전통에서 돌아서서 종교개혁자가 된 계기는 성경을 통해서였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츠빙글리는 사탄을 정복한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능을 확신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은 때로는 역사 현장 속에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구원의 은총이 담겨져 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의 성경적 확신에 감동을 받는다.

성경을 통해서 믿을만한 합당한 근거를 찾은 후에, 그는 지속적으로 생활의 개혁과 윤리적인 갱신으로 구체화 되어야만 할 것을 역설하였다. 츠빙글리의 복음적인 발견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특징 지워졌다. 부당함과 불공정에 맞서서 역사 속에서 참된 의로움을 시행해 나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순종하라는 것이 츠빙글리의 메시지에 담긴 특징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개혁은 전 세계적으로 각성과 연계되어져 있었다.

츠빙글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였고, 그의 스위스 시민을 향한 애국심은 사회정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감각을 새롭게 하였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스위스 지역 종교개혁자들의 연대를 묶어내는 요소가 되었고, 후대 종교개혁자들, 특히 제네바의 칼빈과 그를 따르는 주변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취리히 지역의 종교개혁이 모든 기독교 세계의 개혁운동으로 확산되어지도록 하는 강력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군대에 의해서 비참하게 츠빙글리가 처형당한 곳에는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끝>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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