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신명기 역사가는 남다른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이 참담하게 된 것은, 경제력이 부족해서도, 군사력이 모자라서도, 바빌론이 강해서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길이 먼 데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말씀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신 30:12-14)고 한다. 생명의 길이 나 밖에 있지 않고 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매사를 남 핑계만 대는 사람치고 잘되는 사람 없다. 아무리 주변 환경이 열악해도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그래도 성공적인 삶을 산다. 사실 유다가 멸망할 당시 위로 지배자로부터 아래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신실함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인들은 이리 붙고 저리 붙는 기회주의자들이었고, 강대국의 시녀노릇을 자처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의 생활은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볼 수 없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는데도 유독 죽는 길로만 치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의 길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 마음인데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문제이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 5:17)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언표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일지라도 다를 바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내적 갈등은 더 심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 안에서 사는 것 못지않게 복음 안에서 살고자 했을 때 더 큰 내적 갈등을 겪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탄식하기까지 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면할수록 유혹은 더욱 커지고, 내적 갈등은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육에 의해 정향된 나를 부정하는 일이 그처럼 쉽지 않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역사의 명암이 교차하는 역사 현장에서 사셨기에, 불가피 시련과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엄격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너그러울 필요도 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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