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중심에 있는 교회

문명의 이기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극명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게 하라”(마태복은 28장)고 위탁했다. 한마디로 세계화는 예수님의 선교명령이며, 세계민족과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따라 2000년 동안 전 세계민족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왔고, 펼치고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 교회는 복음을 통한 세계화 과정의 한 가운데 있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세계화 명령을 부여 받은 기독교 교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동서 로마를 포괄하는 지역을 기독교화 했고, 이는 유럽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313년).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헬레니즘 문화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이슬람세력의 확장은 동방기독교지역인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교회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 이후 북으로 선교방향을 틀어 북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동방교회는 이슬람에 내준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대신해서 동유럽과 러시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면서 서방의 가톨릭 세력은 잃어버린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되찾으려 십자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은 1천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계선은 고착화되었고, 오늘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깊은 갈등에 놓여, 곳곳에서 종교전쟁 일어났고,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선교를 통한 세계화는 유럽대륙 안에서 시작되었다.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인은 유럽식, 아프리카인은 아프리카식, 아시아인은 아시아식으로 살았으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다.

세계화는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과학기술과 항해술, 특히 신무기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1494년 이탈리아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가와 교회의 지원을 받아 미 대륙을 발견했다. 이는 최초 세계질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선교학자들은 이 때의 선교를 ‘신문명과 무기를 앞세운 공격적인 선교였다“고 주저하지 않는다.

요한 칼롱은 이를 새로운 세계체제의 ‘구조적 규정’을,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으로 도식화했다. 그는 “제1세계는 ‘작취’, ‘가르기’, ‘침투’로 직·간접적 방식으로 제3세계를 폭력적으로 지배한다”고 했다. 이는 19세기 제1세계의 제국주의에 의해 제3세계의 종속적 지배와 저개발로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코로나19’정국서도 일부선교사 자신의 업적 드러내는데 혈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다

유럽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점령함으로써, 유럽의 문화와 종교, 특히 가톨릭교회와 유럽의 생활습관이 남미를 중심으로 미 대륙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우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식 세계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세계화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세계 최초의 식민지 과정이다. 그 중심에 가톨릭교회가 있었다. 유럽문명이 남미를 점령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세계화는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를 세계화의 첫 번째 단계라고 말 할 수 있다.

오늘 남미에 가톨릭교회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가톨릭교회가 남미에 들어가 한 일은 차후 밝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세계화를 실현한 것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콜럼버스는 항해에 나서면서 기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을 주문같이 외우면서, 미대륙을 향해 항해했다.

당시 콜럼버스는 다른 나라를 점령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세계지배를 생각하면서 신대륙을 향해 항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로 시작된 세계화는 500년이 지난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맘몬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독일 언론지 <슈미겔> 기자가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년을 기념해서 풍자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크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다”

이 풍자는 오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맘몬(돈)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교회도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오늘 ‘코로나19’바이러스 재앙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돈’(재정)부터 걱정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증로 인해 세계의 국경이 봉쇄된 상황에서도, 세계선교는 멈추지 않고 있다.

어쩌다가 선교의 효과가 드러나면, 선교사들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승리”라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며, 미대륙을 향해 항해한 콜럼버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당시 콜럼버스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을 살육하며, 점령군으로 들어가 기독교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분명 예수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 하나님나라선교에서 이탈한 것이다.

1단계 세계화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추동되었다면, 2단계 세계화는 17세기 영국인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다른 대륙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점령, 식민지화함으로써 유럽의 문명과 다른 대륙의 문명 대립의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두 번째 세계화는 영미식 식민지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2단계 세계화는 가톨릭보다도 개신교가 큰 힘을 발휘했다.

신자유주의에 드리워진 그림자

당시 선교사들 역시 1단계 포루투칼, 스페인식 선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미 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유럽에서 미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에 들어와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다. 이들로부터 교육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들로부터 신앙훈련을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걱정스럽다”고 적었다.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영미선교사들은 아서 브라운 박사의 지적대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 정치, 사회 등을 몰각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천상의 삶만을 중요시 하는 선교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식민지 세력에 의해 고난당하는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한민족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철저히 봉쇄했다.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사이며, 해방사인 ‘출애굽기’를 보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기는 교인이 있으면, 교회에서 추방하는 잘못도 범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교육한 한국교회 초기 목회자들보다 먼저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했으며,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신사참배’결의하는데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특히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한국인을 상대로 농기계장사, 운산금광운영, 경성 전기가설권을 비롯한 상하수도 설치권, 전차선 사업권 등 자국의 경제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활동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도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 선교사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반박에 동의한다. 일부 선교사들은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의 왕정 아래서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했다. 남녀평등사상의 고취와 양반계급 타파, 서양의 선진교육 보급, 사회사업, 의술보급 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헐버트를 비롯한 피터슨 등과 같은 선교사들은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과 고난당하는 한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며, 잠자는 한국인을 깨우는 일에 앞장섰다. 한마디로 고난당하는 한민족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 몰각

그러나 선교사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남미 등 피선교국의 문화를 민속으로 만들어 버렸다. 피선교국 민족의 종교는 미신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언어는 방언이 되었고, 예술품은 수공업이 되었다. 한마디로 유럽의 것이 윤리학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유럽의 종교는 선하고, 이들 나라의 토속종교는 피선교국 국인들에게 해만 주는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식민주의와 선교모델’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온 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의무는 타 민족들이 우리를 받아드리고, 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기를 원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자연법사상에도 크게 반하는 것이었다. 이 자연법사상은 가난한 나라를 선교 할 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식민지와 선교종합’이라는 이름으로 남미를 정복한 유럽인들은 유럽의 언어를 쓰게 했고, 유럽의 옷을 입게 했다. 남미의 작가 갈레아노는 이를 “남미인들에게는 ‘일식의 역사’가 되었다”고 평했다.

세 번째 세계화는 1990년 소련연방과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이후, 미국이 세계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됐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라고 말 할 수 있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중심의 세계화와 영미식 세계화는 유럽문명의 한계를 드러냈다. 오늘날 세계화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로서, 더욱 공고히 기초를 다진 세계화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한마디로 경제 질서 등을 총괄하는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2단계 세계화 이후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같은 의미를 생각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여기서 한 발 더나가 개인의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주장했다. 20세기 들어와서는 국가로부터의 자유, 관료체계로부터 자유,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했다. 이는 곧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같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분명한 것은 유럽과 미국에 의해 추동된 세계화는 개인의 능력에 맡겼다. 따라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은 경제적 활동이 미약해 더 빈곤해졌다. 한마디로 경제적 불평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는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관계,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많은 국가들이 경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식민지국가들은 부와 자원을 수탈당하고, 잉여생산물을 처리하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일부 목회자들이 유럽을 비롯한 미국 등 기독교 국가들이 잘 산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들 국가의 악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분명 이들 국가는 가난한 나라의 부를 빼앗아 경제적으로 부유함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 국가의 부와 자원을 수탈해 자국의 이익을 챙겼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경제적 활동을 한 선교사들의 형태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의 길을 따르자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유의 절실함을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도 소중함을 느꼈다. 하지만 세계화를 주도한 자유주의 국가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점령하고 착취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인간의 자유에 맡겨놓자, 힘 있고 능력 있는 개인과 국가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힘없고 나약한 개인과 국가는 점점 무능해졌다.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격차를 크게 벌였다. 이 때 이를 해결하겠다며, 나선 것이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90년 소련의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경제 불황의 늪에 갇혀 있던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국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왔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시장경제는 오늘 영미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는 대한민국 우파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부정하며, 미국 대통령을 연호하는 식민적인 사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악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정치가는 물론, 성직자, 교인까지 강대국의 권력이나 자국의 정치세력에 굴종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를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이것은 한국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목회와 교인들이 보여 온 모습이다. 여기에다 성직자들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각혜택을 누렸다. 그렇다 보니 일본식민지세력과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몰각 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배신하는 신사참배에 앞장섰고, 군사독재정권의 ‘피 묻은 손’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잘못을 범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개신교 교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제1계명에서 이탈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 숭배, 강대국의 숭배를 거부하셨다. 이것이 예수의 길이었고,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길이었다. 세계화된 세계민족이 세계에서 자본이 왕 노릇을 하는 인간들에 의해 당하는 고통을 극복하려면, 특히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교회는 예수님이 극복했던 세 가지 유혹을 뿌리치고,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 본래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면서, 인간은 탐욕과 욕망에 빠졌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파괴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의학으로는 치료 할 수 없는 각종 질병들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온 세상과 그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로마적 유혹, 권력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교회는 몸을 낮추어 각종질병과 가난, 전쟁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웃,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파수꾼으로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한 “온 세계로 퍼져 나가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게 하라”는 세계선교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제 오늘의 세계상황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가야 할 길, 예수의 길, 선교의 길은 극명하다.

예수님이 거부한 맘몬,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맘몬을 물리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을 살라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내용처럼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한국교회가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사실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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