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한철목사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해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다른 아들에게 가야 할 유산을 가로 챘을까? 리브가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모습 가운데서 그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삭의 결혼 대리인인 아브라함이 시종이 메소포타미아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리브가에게 “네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창 24:23-24) 리브가는 친가의 계보를 말하지 않고, 외가의 계보를 말하고 있다. 어쩌면 밀가는 여족장이 아니 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이 누이를 가나안으로 시집보내면서 축복한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될 지어다”(창26:60)

 시집가는 누이에게 남편 ‘이삭의 씨’가 아닌 모계를 통해 자기를 인식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당차고 모험적인 여성이다. 그렇다면 남편 이삭을 속인 리브가는 부계전통 안에서 섬기던 신을 모계전통으로 옮겨 섬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족장의 수호신으로서 신화가운데 머물던 하나님이 야곱 대에 이르러 신화 속에서 나와 세속 세계로 여가화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의 현장에 드러난 신은 자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함으로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갈등가운데서 온전함을 갖추었다.

 세속 사회에 들어온 하나님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내 안에 들어 왔을 때 아무런 갈등도 일지 않았다면, 실은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이 참으로 내안에 들어왔다면, 나를 뒤집어 놓고, 고뇌하게 하고, 변화시키고, 나로 하여금 갈등하게 해야 맞다. 믿음이 내 욕망에 박수를 쳐주고, 내 욕심과 내 옹졸함, 그리고 내 무기력과 내 편견에 무심하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조선에 처음 복음이 들어 왔을 때 나라는 금방 뒤집어 질 것 같았다.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천륜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진다가 난리가 났다. 믿음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 새로운 가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오전한 믿음은 세상과 갈등하게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요구하며, 탐욕을 질책하고, 분쟁 가운데서 평화를 말하는데 세상이 좋아 할 까닭이 없다. 

 함께사는 세상은 갈등하는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등하는 세계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갈등하는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 기준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 양심은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께 옳아야 한다./백향목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