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이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으로 살면서 이웃을 사랑하여 조선에 찾아왔고, 한 생을 바쳐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희생의 삶을 토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한반도에 첫 주재 선교사로 알렌이 들어오게 된 때는 1884년이었는데, 당시 구한말 조선에 살던 백성들은 그야말로 “상처입고, 찢어진 가슴”을 부여안고 어찌할 수 없던 때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를 모른 채,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를 열망하고 있었다.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처음 한국인들을 만나고 난 후에 “찢어진 가슴” (broken heart)을 가지고 살아가던 불쌍한 사람들이었다고 여러 차례 술회하고 있다. 부패하고 무능력한 정부를 사랑하고 지지해야만 했는데, 너무나 허약하고 무기력하여 국민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불행한 상황들로 인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블레어 선교사가 보기에 너무나 가련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이런 극도로 비참하고도 참담한 조건들로 인해서, 오히려 한국의 성도들은 구원의 복음을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처받고 찢어진 가슴을 가지고 살던 자들에게 복음이 주어졌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애통하고 회개하며 슬퍼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은 심령이 찢어진 자들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외면하지 않으신다. 바로 그 무렵에 이르러서야,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내한할 수 있도록 입국의 통로가 열려지게 된 것이다.

한국에 복음의 문호를 열어놓은 사람들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면서, 초기 선교의 의미와 교훈을 찾으려 할 때에, 알렌 선교사 한사람만의 공헌과 탁월한 헌신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여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후원교회들, 중국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의 활동과 성원, 고종과 주변의 정치인들, 만주에서 영국 선교사들과 접촉했던 초기 한국 신자들이 함께 연루되어서, 비로소 한반도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업적과 성취를 가능하게 되었다. 북장로회가 알렌과 헤론을 파송하게 되는 일련의 준비과정으로 청나라가 일본의 한반도 장악을 염려하여 조선과 미국 사이에 “통상조약”을 맺도록 추천하여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 한국 주재 미국 공사관이 세워졌고,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했던 푸트 (Lucius H. Foote)가 1883년 5월 13일에 입국했다. 그 답방으로 조선에는 견미사절단 (단장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변 수, 고영철, 현광택, 최도민) 이 미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등을 접견하고 돌아오던 중에, 감리교회 가우처 목사 (John f. Goucher)를 만나서 큰 후원을 얻게 된다. 가우처는 일본에 파송되어 있던 매클래이 (R. S. Maclay)로 하여금 조선을 방문하게 하여, 개화파 김옥균의 추천으로 국왕에게서 병원과 학교 설립의 허가를 받았다. 또한 일본에 있던 장로교회 선교사 엘린우드 (F. F. Ellinwood)가 계속해서 한국선교를 호소하여 1885년 2월, 의사 헤론과 언더우드를 파송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역이 시작되기까지 수많은 준비작업이 조선왕국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각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기관들이 움직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