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호관 목사
누구에게나 옳고 그름에 대하여 판단 받을 세 번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 이를 삼심(三審)제라 한다. 억울하게 정죄 받는 일을 최소화 하자는 인간적인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헌법이 있고, 육법이라는 것도 있고 법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판에 회부되지 않은 범죄자가 얼마나 많은가? 영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재담 중에 “제11계명 들키지 말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지키는 경찰관이 있고, 법이 있는데도 들키지 않고 잘 사는 범죄자들이 얼마든지 많음을 회화적으로 나타낸 말이니 세상의 법과 법정의 한계를 이보다 잘 나낸 말도 흔치 않으리라.

들켰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강심장도 있다. 이런 사람은 무법의 사람이다. 그것도 법을 집행하는 최고 권좌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무법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보면 할 말을 잃고 만다. 이것이 사회의 어둠이고 법의 한계이다. 건강한 부부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일 가운데 하나가 부정행위 혹은 부적절한 관계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역시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데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유행한 때도 있었다. 돈으로 법을 사고, 돈으로 선고장을 사는 불의한 부자들이 있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사람은 아마 탈법자일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들을 보면서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허탈해지고 엄청난 박탈감에 치를 떨게 된다.

이런 여러 모양의 지혜로운(?) 범죄자들, 들키지 않는 사람을 붙들어 세우는 법정이 있으니 이를 제4의 법정이다. 그 법정은 양심이라는 법정이다. 이 법정의 변호사가 양심이요, 검사가 양심이요, 재판장도 양심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고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심까지도 전당포에 저당하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제4의 법정까지 요리저리 곡예 하듯이 피해 사는 정말 악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안 들킬 완전범죄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위를 즐기며 잘도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이미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일 게다. 이런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옥이라는 영원한 형벌의 처소를 마련해 두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목적이 바로 영원한 형벌의 처소로 가는 문을 가로 막아서는 신령한 작업이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불치의 병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을 거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전도가 아니라는 말이고,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도 물론 아니다. 교회가 힘을 잃고, 목사가 힘을 잃은 까닭은 죄를 죄라고 선고하는 의로운 법정으로서의 교회, 엄중한 최종 선고를 해야 하는 선지자로서의 목사가 본무를 떠난데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죄라는 말 대신에 실수가, 회개라는 말 대신에 축복이 계속하여 선포되는 한 교회의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첫 발언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였다는 것을 모르는 목사가 있을까? 강단의 강력한 능력의 회복은 제4의 법정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있다. 양심회복 운동, 제4법정 회복운동이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개혁총회 전 총회장·본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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