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굳이 연좌제의 연원을 따지자면 고대 중국에까지 소급할 수 있는데,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없는 사람까지 처벌하는 제도이다. 당시 연좌제는 가족·친족 등에 대한 혈연적 연좌(緣坐), 지역주민이나 동료 관리들을 연대책임을 물어 벌주는 연좌(連坐)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중 전자, 즉 조선시대 격렬한 정쟁의 과정에서 정치범의 친인척에게 가해진 연좌는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음은 역사 속에서 증명된다. 그런데 1894년 이후에 실제 연좌제는 완전히 사라졌을까? 연좌제가 형률로서 법전에서 사라지긴 했어도 연좌제의 망령이 지금까지 여전히 우리의 삶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이젠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 변신한 소설가 이문열이 한국전쟁 때 월북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시절 연좌제의 족쇄 속에서 불우한 유년을 보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9년에 경찰이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에 반대해 벌인 촛불시위에 참석한 한 인사를 기소하면서 그 배우자, 아버지 등 가족의 ‘공안사범 조회 리스트’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까지도 연좌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전력이 공안기록으로 분류되어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수사에 활용되고 있은 것은 사정 당국의 ‘연좌제’식 수사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연좌제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2010년 12월 28일)

연좌의 대표적인 죄는 모반대역(謀反大逆) 범죄이다. 모반대역은 오늘날로 치면 쿠데타, 반란, 국가전복 행위 등을 의미하는데, 이때 대역죄 인을 능지처참에 처할 뿐만 아니라 죄인 가족들도 연좌 처벌을 하였다. 그렇다면 작금의 검찰의 가족, 친지, 우인 등을 협박, 수사 모의, 구속, 검언 유착 등은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한다고 생각한 21C판 삼족을 멸하겠다는 연좌제는 아닐까? 삼족을 멸하는 식의 수사라면, 언론 역시 국민을 노비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검찰과 언론의 공조로 가족, 친지, 친우 등까지를 협박한다는 말이 회자 된단 말인가? 감히 생각해서도 안 되는 악랄한 일을 계획했다는 것 자체가 삼족이 멸하겠다는 식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 생각해 본다. 얼마나 악랄한 것이면 검찰 수사관이었던 사람이 가족을 염려하여 자신의 생을 마감했을까? 그런데 삼족을 멸하는 식의 수사를 하는 자들과 그러한 수사에 편승하는 언론들의 무책임한 보도는 그 당하는 자들에게는 ‘악마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감히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 등을 입에 올린다면, 속이 뒤집어 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지(死地)를 오고 가는 고통을 당한 분과 그 가족, 친지, 이웃 등이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민, 형사상의 책임을 묻는 몸부림에, 언론사들도 오보, 허위, 거짓 등 시인할 수밖에 없어 정정 보도 등을 하는 일도 있지만 그 역시 정직해 보이질 않는다. 엄청난 양(量)을 쏟아 부은 보도는 말끔하게 되돌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쏟아진 물과 같다 하지 않을까? 그런데 잘못된 보도임을 알면서도 그 거짓, 오보 등에 박수를 보내는 자들은 왜일까? 무슨 목적에서 오보, 허위, 거짓 등임을 알면서도 퍼 나르는 것일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기가 등등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양심에 화인 맞은 외식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본다. 부언컨대 ‘기자’들도 왜곡,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특권적 성역일 수 없다. 따라서 언론자유는 언론사 사주(경영주)를 향해 먼저 주장해야 할 것이다.

(24)소경된 인도자(引導者)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화(禍)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書記官)들과 바리새인(人)들이여 잔(盞)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貪慾)과 방탕(放蕩)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4-2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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