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카포레트(תרפכ)는 주로 출애굽기 성막 건설과 관련하여 18차례, 구약에 모두 27 차례 나온다. 히브리어 동사 ‘덮다, 가리다, 달래다, 용서하다’의 카파르(רפכ)에 뿌리를 둔다. 유대교 성경과 일부 번역본은 카파르의 어원을 살려 ‘덮개’(NJV , NEB), 또는 ‘뚜껑’(NASB, NIV) 등으로 옮긴다. 개역개정은 ‘속죄소,’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속죄판’으로 번역하지만 구역(舊譯: 1911년)은 ‘시은소’(施恩所)다. 흠정역의 ‘mercy seat’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최근의 NRSV(1989)도 흠정역을 잇는다.

카포레트는 속죄소, 시은소, 뚜껑 등 세 번역으로 압축된다. 먼저 뚜껑은 사전적 의미를 받아들인 것으로 법궤의 한 부분처럼 오인하게 한다. 법궤의 제작과정에서 이미 그 덮개까지 만들어진 상태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10-16절)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독자적인 역할에 초점을 둔 것이다.

따라서 카포레트가 ‘법궤의 위’에 놓인다고 해서(21절) ‘뚜껑’으로 번역하면 그 의미와 기능이 축소되거나 법궤의 일부로 예속된다.<Houtman, 381> 출애굽기의 성막 제작과정에서 이미 법궤의 뚜껑과 카포레트를 서로 다른 물품으로 소개하고 있고(출 31:7; 35:12; 37:5) 외부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Sarna, 161> 즉 법궤의 뚜껑(evpi,qema)은 금 고리 네 개의 경첩으로 법궤에 붙어있고 양쪽의 두 그룹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카포레트가 덮개 위에 놓여있다.<III, 135, 137> 법궤에 언약의 두 돌판을 넣은 후 뚜껑을 덮고 카포레트를 그 위에(לע) 놓는다(출 40:20). 요세푸스의 증언을 비롯한 유대교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카포레트는 법궤 위에 놓인 별도의 견고한 순금의 판(slab)이다. 따라서 법궤와 카포레트는 별도의 두 가지 성물로 봐야한다.<Houtman, 381>

두 번째는 ‘속죄소’다. 카포레트가 피엘동사 ‘키페르’에서 비롯되었다면 ‘덮개, 뚜껑’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화목제(propitiatory)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활용되었다. <70인역>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은 신약의 ‘화목제물’(롬 3:25)과 ‘속죄소’(히 9:5)로 약간 혼선을 일으킨다. 그리스어로 화목제물은 ‘힐라스모스’(ίλασμως)이고 속죄소는 ‘힐라스테리온’으로 위치를 상정한다. <70인역>이 카포레트의 공간적 의미를 인식한 것은 옳다. 따라서 속죄소는 ‘죄의 대속을 위해 속전을 지불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출 21:30; 레 4:26; 시 32:1). 번제단에서 헌제자의 제물이 태워지고 성소의 분향단(תרטק)에서 연기로 사라진다. 이렇듯 헌제자의 죄는 지성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해소된 상태다. 그렇다면 지성소의 카포레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들어간다. 법궤 위의 카포레트에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리고 하나님께 속죄한다(레 16:18). 카포레트에서 두 그룹의 양쪽 얼굴이 서로 마주하며 하나로 연결되듯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고 말씀하신다(출 25:22). 이스라엘의 죄는 이미 연기와 향으로 속죄되었기에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배타적 현존(現存)에 그 신학적 의의가 있다. 그러니 카포레트는 이스라엘의 죄보다 하나님의 현존과 인도에 초점을 둬야하고 그 점을 부각시켜서 번역해야 한다. 이점에서 시은소(施恩所), 곧 ‘은혜를 베푸는 곳’이 힘을 얻는다. 루터 역시 ‘Gnadenstuhl,’ 최근 개정된 예루살렘 성경도 시은소로 번역한다. 사르나는 시은소가 해석에 가까우며 카포레트의 내재적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입장이다.<Sarna, 161> 시은소가 카포레트의 어원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넘은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살려낸 번역이다.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 하나님의 현존 법궤, 그분을 호위하는 그룹, 그리고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이 실현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 하나님은 번제단에서 죄를 불사르고 카포레트에서 은혜를 주신다. 사족 하나. 휴 스토웰(Hugh Stowell)의 찬송 “이 세상 풍파 심하고”에서 마지막 단어는 ‘시은소’다. 그런데 <새찬송가>는 속죄소나 덮개도 아니고 “주의 전”으로 바꾸어서 카포레트의 본뜻과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는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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