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103주년이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교리적 영적 부패를 온몸으로 저항해 일으킨 기독교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자 바른 신앙을 위한 피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종교개혁은 하나의 잊어진 사건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개혁은 스스로를 불살라 새로워지는 것인데 새로워지기를 포기하고 안주하려는 몸부림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오늘처럼 강대해지고 외형적으로 비대한 모습은 아니었다. 1903년 원산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불길이 1907년 평양으로 점화되면서, 교회로서의 영적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오늘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09~1910년 사이에 일어난 ‘백만인구령운동’이 일제 강제병합에 따른 저항의식 약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흥운동과 함께 각 교파들의 연합운동이 진행되면서 교회의 외형적 확대에 영향을 주었다.교회가 교회다운 순수성을 발현하기 위해 외적인 고통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는 민족과 교회 모두에 비극이었지만 그것이 건강한 토양이 되어 더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교회가 민족의 등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침탈행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교회는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지만 그 당시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개혁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반기독교적인 부조리로부터의 저항이 그것이다.이러한 저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다. 일제라는 반기독교에 항거하지 못하고 순응함으로써 스스로 암흑기를 초래했다.교회가 우상숭배를 총회적으로 결의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후 1946년 6월 열렸던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다시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다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참회했지만 한번 더러워진 수건은 아무리 빨아도 걸레일 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한국교회가 남긴 가장 큰 오점이다. 결국 해방 후에 교단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증거이다.개혁하는 교회로서 한국교회가 남긴 두드러진 죄과는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분열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박형룡의 선교비 3천만환 공금 유용사건과 WCC 탈퇴를 둘러싼 입장 차이를 들 수 있다.그 어떤 구실과 변명에도 불구하고 분열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보수와 진보 모두는 분열의 틀 안에서는 범죄자일 뿐이다. 종교개혁이 분열을 위한 도구가 될 줄 알았다면 개혁이란 용어를 감히 쓰지 말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는 지금 진행형이다. 지난 종교개혁 100주년을 기해 한국교회가 분열 역사를 참회하고 하나되기 운동을 일으켰으나 그 또한 서로의 이해타산이라는 벽에 막혔다.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이벤트로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되는 데 특별한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스스로가 죽어야 더 큰 생명체로 성장할 수 있음을 모르는 무지는 여전히 한국교회에 발목을 잡고 있다.

코로나19로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는 이미 1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의 가시적 제도적 통합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개혁이 아닌 너로부터 시작하는 개악에 집착하는 한 종교개혁은 수치스러운 이정표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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