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종교개혁을 말할 때에 개혁교회(개신교회)가 탄생했다, 혹은 하나의 교회에서 또 하나의 종파가 생겨난 정도로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그 정도가 아니다. 2006년 타임지(Time 誌)는 인류역사에서 100 대 사건을 소개했다. 그 중에서 ‘종교개혁’이 최상위에 위치한 것으로 발표했다. 16세기(1517년)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종교문제 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제관계 등 개인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한 때문이다.

그렇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발현, 개인양심에 대한 자각과 권리, 직업과 윤리, 정교분리(政敎分離), 성경의 대중적 보급, 평신도의 만인 제사장적 위상 확립 등 너무도 많은 것들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꾼 사건이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은 한마디로 당시의 로마교회의 타락, ‘종교타락’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신앙양심의 회복, 성경가치의 재발견,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교회는 면죄부 판매, 성물 판매를 통하여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기극을 벌였으며, 엄격한 심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마리아가 중재자인 것처럼 마리아 숭배도 강요했다.

또한 보속교리(補贖敎理)로 사람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강요하였으며,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혀지게 하여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며, 성경 해석의 권리 또한 성직자들의 절대 권한이 되었었다.

교황의 교리 선포는 절대 무오류하다며 종교적 전횡을 일삼았다. 게다가 성직자들의 독신을 주장하면서도 성적 타락까지 일삼고, 복음적 가치를 타락시켰다. 그리하므로 자연히 성도들의 우민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하여 에라스무스(Erasumus)는 우신예찬(愚神禮讚)으로 미신적 신앙행위에 대하여 조롱하기를 ‘난파된 바다에서 마리아상을 붙잡는 것보다 널판지를 붙잡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려고 작정하셔서 개혁자들을 등장시키셨다. 천주교 사제(司祭)였던 마틴 루터를 통하여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하게 함으로 비로써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하셨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강한 영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모토(Motto)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에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많이 상실한 지금, 엄중한 현실 교회를 향한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여 제2의 종교개혁을 강요받고 있음을 알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1. 교회는 고감도의 영적 자각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정국까지 몰아친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성경에서 사사(士師)였던 삼손은 들릴라의 무릎에서 머리를 깎여 능력을 상실했다. 한국교회는 지금 머리 깎인 삼손 같지 않은가? 지난날의 죄악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여, 죄 씻음을 받아 깨끗한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나는 회개운동이 있어야 한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다고 하셨다.

한국교회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성력의 능력으로 됨을 인정하고 철저히 말씀에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겸손하고 간절하게 주님께 구해야 한다. 정치적 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서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로마교회 교권자들이 만들어낸 교서(敎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능력이었다.

현재도 인간들이 교회에 머리가 되려고 하는 자들이 있는가? 교회지도자들도 자신은 죄인의 괴수라고 통회하여야 한다.(딤전1:15)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자처했던 교부 암부로시우스(Ambrosius)처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진리를 온전히 따라야 한다. 입으로 전한 바를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지난 수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교회에 욕이 되게 하는 일을 하였는가? 그것이 본심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 교회를 교회되게, 산 위의 등대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해야 한다.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세상의 소망이시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해야 한다.

2. 사회적 책임 감당의 사명감을 새롭게 해야 한다.
복음이 가는 곳에 교회가 세워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의 심령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복음의 능력이며, 그 복음을 담보한 교회의 역할이었다.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국가의 보물이 성경이라고 했던 바, 복음이 국가와 사회를 세우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였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거룩한 역사를 가져옴으로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1885년 이후, 우리사회는 너무도 바뀌지 않았던가! 너무도 가난하던 나라, 그래서 생겨난 말, ‘3일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 없다’고 했는데, 복음은 ‘3일이 아니라 굶어죽어도 도둑질 안 한다’가 되었다. 이것은 신앙의 표본적인 모습이며, 복음이 세상에 너무도 선하고 큰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한국교회는 아직 맛 잃은 소금이 아니다. 불 꺼진 등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계신다. 이제 나태함에서, 또는 교만의 자리에서, 패배주의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복음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일할 때라고 믿는다.

인류 구원의 복음을 소유한 교회가 세상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분연히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한다. 사회에서 반기지 않는 이가 있다 해도, 인류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주신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