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쿠루나 19이후 세상은 뉴 노멀로 인해 인식자체가 변화되어 이전 처럼 생각하는 것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자로 낙인 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이천년 전 골고다 산상에서 대속의 은총으로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생명을 구원 받는 의미에서 세상의 뉴 노멀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다른 기준과 틀이 세워지고 사회인들이 변화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도들의 삶은 영적인 삶이라 코로나19 이전이나 이후에도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의 방식이나 전도의 방식은 그대로 일지라도 그 형식에는 약간의 변형이 있음도 인지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전과 같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기준과 변화 속에 동화된 사회인들은 그대로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회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기독교의 영적인 영혼 구원의 방향과 길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기준으로 변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진리의 말씀에서 다르게 변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전처럼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방역 지침에 의해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소독 등이 걸림이 되어 모임이 이전처럼 복원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진리와 믿음의 형태는 그대로 변함이 없다.

사회의 어떠한 변화나 새로운 기준에 의해 돌아가더라도 기독교는 진리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 없기에 기독교의 특유의 순교 정신을 키워 나가야 함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종교 세력들을 대항한 방법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받아 드린 것이 오히려 기독교 탄생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도 생명과 진리의 선교와 전도를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을 스승처럼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기독교의 특성은 목숨을 버려야만 다시 살아나는 특성이 있다.

현대 기독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생존의 진리를 발견해야 만 한다. 십자가의 죽음과 순교는 바로 기독교 생존의 비법이다. 기독교의 선한 양심이 살아나게 하기 위해선 육신적인 생각과 방법과 인위적인 술수와 방법으로는 기독교가 생존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결실을 맺는다고 한 것처럼 기독교의 생존의 길은 희생과 죽음이다. 그런데 창피한 일은 기독교회가 보이는 세상에서의 물량으로 성공의 잣대를 가름하고 있음이다. 누가 더 큰 예배당과 더 많은 수의 신자를 거느렸느냐에 따라 세속적으로 평가 되는 현실이다. 이 세속적인 생각과 자만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하는데도 실상이 그런지 의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들이라고 한 것처럼 기독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희생과 죽음을 각오해야 만이 현 시대에서 거룩한 교회로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기서의 죽음은 세속적인 육신의 죽음의 의미보다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육신을 위한 희망과 세속적인 욕망, 이기적인 생각, 권위적인 자세, 가롯인 유다와 같이 종교를 출세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생각들의 죽음이다. 성경에 계시한 영적생존을 위해선 겉만 기독교가 아니라 속이 세속적인 때를 벗어 버린 선한양심의 회복을 말한다. 세속적인 목표로 성장을 논하다보면 머잖아 전체가 함께 멸망을 피할 수 없음도 인지하자.

생존(테렌스 데프레(차미례) 서해문집 2018)이라는 책 속에 저자는 1870년의 파리, 레닌그라드의 900일, (페스트)에서 생존은 세상에서 인간이 격을 수 없는 비참한 죽음이라도 결코 죽음과 타협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가 관건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말씀 속에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은 교회가 성장을 위해서 세속적 방법과 타협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보는데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신앙생활 중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타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기독교 신앙이 살아남기 위해선 세속적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여야 한다. 그렇지만 죽음과 타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문제다.

교회는 여태껏 성장을 빌미로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내 교회를 위해 힘없고 가녀린 작은 교회나 개척 도상의 교회에 적을 둔 신자나 초 신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성장의 빨대를 꽂고 빨아드리면서 포만감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세속과 타협한 결과가 아닌가? 교회생존을 위해 코로나 19 이후부터 초대 교회 모습 재현을 희망한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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