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 성 길 목사

  깊은 산골 작은 마을에 살던 영자는 중학생 때 엄마 품을 떠나 어린 나이에 면 소재지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열세 살 소녀가 혼자 자취 생활을 하려니 힘든 데다 엄마도 보고 싶어 자주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살에 걸렸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면서 열이 나고 어지러워 학교에 나갈 수가 없었다. 끙끙 앓으며 “엄마, 엄마” 불러도 먼 곳에 있는 엄마가 달려와 줄 리 없었다. 그때는 휴대 전화도 없을 때라 당장 연락할 수도 없었다.

소녀는 약이라도 사 먹어야 할 것 같아 부들부들 떨면서 약국까지 겨우 걸어갔다. 30대 약사 아주머니가 이마를 짚어보더니 “아이고, 펄펄 끓는다.” 하면서 약을 지어주셨다.

“엄마한테 가서 소화가 안 되니까 죽 끓어달라고 하고, 죽 먹고 나서 30분 후에 약을 먹도록 해”

약사 아주머니가 약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소녀는 “엄마가 집에 없어요. 자취하고 있어서……”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약사 아주머니는 어린 나이에 소녀가 집을 떠나 자취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혀를 끌끌 찼다. 약사 아주머니는 그길로 약국 문을 닫아걸고 소녀와 함께 자취방으로 왔다. 그리고 소녀를 자리에 눕게 하고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약사 아주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죽과 간장 종지를 내와 소녀에게 먹으라고 했다. 숟가락 하나들 힘이 없는 소녀에게 죽을 직접 떠먹이고, 간장도 찍어 입에 넣어주고, 다 먹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약사 아주머니는 돌아갔다. 결혼하고 바쁘게 사는 중에도 영자는 그때 약사 아주머니가 끓여준 그 흰죽을 잊지 못했다. 그 흰죽이 자신을 살려냈다고 굳게 믿었다.

5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영자는 어느 날 심한 감기에 걸렸다. 꼭 중학생 때의 그 날처럼 으슬으슬 한기가 들고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우울하고, 슬프고, 아프고, 견딜 수 없었다. “흰죽 먹고 싶어”라는 말에 남편도 아이들도 “끓어 먹어”라고만 했다. 천근만근 내리누르는 몸을 일으켜 흰죽을 젓다가 영자는 수저를 내팽개쳐버렸다. 문득 눈물이 핑 돌면서 그 약사 아주머니가 그리워서 흐느껴 울었다. 영자는 짐을 꾸렸다.

“어디 가려고?”

남편이 묻자 영자는 대답했다.

“흰죽 먹으려”

“어이쿠! 갱년기 아줌마 무서워 죽겠네” 하며 남편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자취 생활을 하던 골목…… 멀리 그 약국의 간판이 보였다. 이름이 40여 년 전 그대로였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약국으로 들어서자 그때 그 약사 아주머니가 70대 노인이 되어 돋보기를 쓰고 뭔가를 읽고 있었다.

“아주머니, 저 모르시겠어요?”

영자가 묻자 할머니 약사가 안경 너머로 보고는 “뉘신지……”하고 물었다.

“열세 살 영자이에요. 그때 아주머니가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흰죽 끓여서 먹여주셨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고!” 하며 할머니 약사가 벌떡 일어나 영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중학생 소녀는 50대 중년이 되고 30대 약사는 70대 노인이 되어서, 두 여인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주머니, 제가 좀 아파요. 약도 지어주고 흰죽도 끓여주세요. 그걸 먹어야 나을 것 같아요.”

먼 거리에 있는 약국에까지 와서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영자의 눈에도. 영자를 보는 늙은 약사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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