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별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
저녁별을 보며 갑니다.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낟알 같은
저녁별.

저녁별을 바라보며
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
풀벌레들을 위해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의 밥상보처럼 덮이고
내 손가락의 거친 핏줄도
불빛처럼 따스해 옵니다.

저녁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
이 흙들이
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

▲ 문 현 미 시인

현대인들은 속도에 밀려서 하늘을 쳐다보는 걸 잊고 사는 것 같다. 빌딩의 숲에서 잠깐 식사라도 하러 나올 때가 있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조차 없다. 참 팍팍한 생활의 굴레에 붙들린 나날이다. 더욱이 코로나 19로 인해 원하든 원치 않든 각자 집에서 지내야 하는 거리 두기의 삶이다.

시에서 노래하는 삶이 얼마나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거의 없으니 이런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시간을 느낄 수 없으리라. “저녁별” 시를 읽다 보면 잃어버린 먼 옛날의 나를 만나게 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시인을 일컬어 ‘가장 죄 없는 영혼을 지닌 존재’라고 했는데 이 시를 지은 시인에게 꼭 맞는 말이다.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과 생각으로 시를 짓는 이준관 시인이다.

시의 첫 연에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 나타난다. 어쩌면 물수제비라는 단어가 삶에서 이미 오래 전 유물이 되어 버린 건 아닌지... 계속 이어지는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낟알 같은/저녁별”, “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풀벌레” 등과 같은 표현을 읽다가 보면 자연스레 “가축의 순한 눈”으로 돌아가고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의 자세로 돌아가게 된다.

참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지은 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시의 선한 영향력에 빠져들게 된다. 들판에 내리는 어둠조차 불안이나 공포대신 “어머니의 밥상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마음도 “불빛처럼 따스”한 온기로 훈훈해진다. 이쯤 되면 하루의 노동에서 “발에 묻히고 흙”이 그날의 “저녁 식량”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경에 “어린아이들과 같지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3절)는 말씀처럼 동심으로 쓴 좋은 시가 마음밭에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그럴싸한 구호나 금력, 권력이 아님을 묵상해 본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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