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연 교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바이러스 집단감염의 진원지로 한국교회가 언론의 몰매를 맞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믿음’을 내세워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비춰진 일부 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보도였다.

군포·안양, 인천 개척교회 발 ‘코로나19’바이러스 집단감염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기주의, 개인주의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오늘 이같은 인식이 거의 사라졌다. 교회마다 정부의 방역수칙을 잘 따르고, 방역에 모든 힘을 쏟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 또한 크게 높아졌다. 오히려 사회 곳곳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500명을 웃돌고 있다. 이런 상황서 교회발 코로나19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책을 보다가 미국 롱비치 교회의 검사 출신 목사님의 간증이 마음에 닿았다. 코로나 정국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국민에게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고 생각해 소개한다.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기르며, 정성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자매가 있었다.

어느 날 아들 형제가 마을의 한 곳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력자 한 분이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 말의 눈에 아들 형제의 죽창에 찔렸다. 그 유력자는 펄쩍 뛰는 말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은 재판정에 섰다. 판사가 그 형제에게 말의 눈이 누구의 죽창에 찔렸는지를 물었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의 죽창에 찔렸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형제의 어머니를 불렀다.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한참동안 법정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부인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리고 판사 앞에서 대답했다.

“작은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세요”/“왜 작은아들입니까?”/“큰아들은 전처의 아들이고, 작은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 않습니까?”/“그렇지요.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이 말에 감동을 받은 판사는 현명한 판결을 내렸다.

“부인, 오늘까지 재판하면서 이렇게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오. 내가 재판장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합니다.”

그리고 그 지방의 지인들을 불러 자기가 감동 받은 이야기를 전하고,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그들이 돈을 모아 교회를 새롭게 건축해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야기이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세상은 인정이 메마른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감정이 살아있고, 인정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인정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그것은 모두가 내 안에 갇혀 혼자만 살겠다는 발로이며, 아우성 친 결과이다.

인정공동체는 죽음의 직전에 있는 사람도 살린다.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 끝을 헤메인다. 이제라도 목회자와 교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코로나19 정국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무조건인 사랑과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참사랑이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예수님의 참사랑은 사형수도 살린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돌아오게 만든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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