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울었다

뽑히지 않으려는 듯 뿌리는 완강하다
흙 속에 든 뿌리를
뿌리째 뽑다니!

사람 속 어디까지 파고든 내가
뿌리째 뽑히는 것 같아
나를 잡듯 뿌리를 잡아본다
어느새
흙 속을 파고 내가
뿌리처럼 들어가 있었다

그때 나는
파를 뿌리째 뽑는 손을 보았다
뽑히는 것이 뿌리만이 아니었다
파를 뽑는 손이
사람까지 뽑아낸다는 것을
파는 파파파
파열음을 내며 신음한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때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가 생각나
파처럼 나는 맵게 울었다

▲ 문 현 미 시인

언제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어릴 적 선친께서 부르시던 <비 내리는 고모령>의 가사가 생각난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징용에 끌려가는 아들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한 노래인데 지금도 들으면 눈물이 핑- 돈다. 사람은 슬플 때, 가슴 아플 때도 울지만 억울할 때도 눈물을 흘린다. 오래 전 필자는 졸시 <슬픔의 비화>에서 “모든 인간은 슬퍼할 그때 사람이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사람의 향기가 묻어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어떤 슬픔에 거짓이 들어 있겠는가. 물론 악어의 눈물이 암시하듯 거짓으로 눈물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선천성 그리움이 있듯 선천성 슬픔도 배태되어 있다.

이 시는 <그때 울었다>라는 제목으로 그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대개 매운 파나, 양파를 깔 때 저절로 눈물이 찔끔 나온다. 그런데 시인은 직접 파를 뽑다가 뿌리째 뽑힌 파를 보며 자신이 흙 속을 파고 “뿌리처럼” 들어가 있다는 상상에 이른다. 이어서 파를 뽑는 일이 뿌리까지 뽑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며 “파를 뽑는 손이/사람까지 뽑아 낸다는 것을” 간파한다. 예사롭지 않은 시인의 눈으로 인해 독자도 그런 함의를 캐는 대열에 합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파파파/파열음을 내며 신음”하는 파의 고통을 헤아리는 시인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아무도 파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시인만은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 시적 화자가 언제 울었을까. 바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뿌리』가 떠 올랐을 때 눈물이 나왔다는 거다. 표현의 묘미는 마지막 행 “파처럼 나는 맵게 울었다”는 데에 있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흑인들의 뿌리에 대한 스토리가 시인의 감성 촉수에 맞닿은 그때, 학대받는 자의 슬픔과 한이 나의 슬픔과 한으로 수용된 것이다. 시인을 일컬어 자기 울음만을 우는 자가 아니라 남의 울음을 울어주는 곡비와 같다고 한다. 앞으로 파가 내는 고통에 찬 파열음에 귀를 귀울여야겠다. 어디선가 신음하는 소리, 울음 없는 울음을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벌써 구세군의 종소리가 들리는 12월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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