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4. 1884년, 갑신정변

토마스 선교사 이후로 16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던 한반도 땅에 마침내 빛이 비췄다. 안타깝게도,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변란이 빚어낸 혼돈 속에 있을 때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초부터 개화파의 중심에 있던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20대의 젊은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던 끝에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12월 6일에는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다.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에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와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 조정 대신들의 회의제 국정운영 등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국가 재정를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고,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하면서 세제 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당시 반(反) 봉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인 민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져왔다.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도망했다. 직간접으로 관련된 개화당 세력 약 600여명이 처형되었다. 젊은 정치인들의 국가장악 시도가 실패하자, 나라는 대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피로 물든 나라, 더 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음의 공포가 뒤엎은 땅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혁파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개혁파의 의지를 높이 인정하면서도, 철저한 국가운영의 준비가 부족했으며,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고 본다.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부패의 요인을 제거,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시각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중국에 속국화 되어져 내려오던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국화 하려 했던 것이다. 일종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갑신정변이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였기에,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을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었다. 급진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가장 치명적인 실패의 요인은 주도자들이 외세에 대해서 전연 인식이 부족했었다는 사실이다. 개화파는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라는 것을 단순히 근대 일본화라고 착각하면서 단지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라고 하였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서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셋째, 구한말 조선의 정신적인 갈등, 사상적 방황과 지도층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 실학파의 구국운동이 실패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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