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바빌론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참담했다. 정치적인 불안과 피폐한 살림, 종교적 회의심과 도덕적 타락까지 겹쳐 하루하루가 힘에 겨웠다. 불신의 그림자는 깊어만 가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산산이 조각나 암울한 때, 그나마 절기를 지킨다는 이들이 금식을 하며 어디선가 희망의 빛이 비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이다. “(참된 금식은)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 그리하면 네 빛이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사 58:7-8)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의 빛을 구하기 위해 금식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야 나무랄 데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금식 규례를 핑계 삼아 길거리에 버려진 이들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희망의 빛을 찾느냐! 굶주리는 이웃을 돌봐야 “네 빛이 세상에 햇살처럼 비칠 것이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평소 신앙을 가장한 종교적 위선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고 개탄하면서 정작 자기는 정직하지 못하다면 세상은 그런 사람을 속물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믿음이 깊어 보이는데, 믿음의 기초가 되는 신실함, 자비심, 불의를 극복하려는 적극성이 없다면 그런 믿음은 위선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향해 “네가 빛을 비추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신 바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행실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연유이다. 빛이신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빛의 분여(分與)’ 곧 예수께서 당신의 빛을 나누어 주신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주님이 ‘큰 빛’이라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작은 빛’이다. 작은 빛들이 반딧불이처럼 어둠을 비추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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