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셋째, 구한말 조선의 정신적인 갈등, 사상적 방황과 지도층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 실학파의 구국운동이 실패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할 정신적인 중추세력이 표류하던 비극적 현상이다. 구한말 왕정 통치의 한계와 봉건제도의 패착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는데도, 개혁적 실학운동은 정치적인 격변에 휘말리면서 사색당쟁에 빠져 있었다. 충효적인 애국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이념적 혼돈의 연속이었다.

간략하게 조선 후기의 사상적 흐름을 요약하자면, 명나라를 무너트린 청나라를 통해서 서구 문물이 유입되었지만,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는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조선-중화주의와 주자성리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북벌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이요, 침략자인 청나라를 끝까지 도덕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조선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개화사상의 선구적인 흐름이 나타나는데, 청나라는 거부하지만, 문화와 산업, 기술은 수용한다는 다소 유연한 자세가 북학(北學)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다.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등이다. 북학을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던 연암 박지원을 정점으로 하여 실학이 점차 수용되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학문이 아니라 기계와 태엽 시계, 각종 태엽 기계 등의 제조 기술을 배울 것과 서양의 학문도 직접 받아들이자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노론 내 비주류인 북학파와 소론 양명학파 외에도 중인 출신 지식인들은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신분제도의 비합리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차츰 외국 문물의 개방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는데, 북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후신이기도 했지만, 개화사상에 따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외정치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노론 북학파의 학통과 정치사상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은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결집하고자 노력하였다.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의 문인들을 문하생으로 삼았고, 1870년대 개항기에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창, 서재필, 유길준, 윤웅렬, 윤치호 등 젊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이들의 논지를 따라서 고종은 1880년대 이후에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했다. 그러나 안기영을 비롯한 대원군 주변 인물들이 고종을 폐위하고,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세우려는 국왕 폐립운동을 추진하다가 역모가 탄로 나면서 급반전되었다.

결국, 구한말 조선 조정은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게 되었다. 이처럼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던 격동의 시기에 기독교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들어온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한말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