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지금까지 치열하게 전개해 온 것에 대한 이해는 결국 종교도 일종의 사업과 같은 성격으로 보았다. 특히 기독교도 종교라는 의미를 가지려 하니 먼저는 믿는 대상, 다음은 신자들, 마지막은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즉 건물이 있어야 했다. 이를 종교구성의 삼요소라고 한다. 그런데 먼저 이 요소를 온전하게 구성하다 보니 외형적으로 더 큰 규모의 종교단체가 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신자들이 부담하다보니 잉여 자산이 늘게 되어 결국은 초 호화로운 모양으로 발전했다.

신은 보이지 않으니 우선 신을 모신다는 전(殿) 즉 신이 계신다는 집인 교회를 성전 화 해 거기에 많은 재물을 들여 최첨단의 성전을 건축한다. 그러니까 신은 보이지 않으니 신이 계신다고 하는 신의 집에 대해 신자들에게 정성을 다하게 하여 헌납된 재물 사용을 우선으로 한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은 성전(교회)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 만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방법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도 세상에서 수천 년간 지탱하여 오다보니 유지하려면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므로 신 중심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이 중심이 되어 버린 결과를 가져왔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부터 출발한다. 말은 신 중심이라고는 하나 실제는 인간이 중심이 되다보니 종교도 일종의 세상의 사업처럼 신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신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에 사람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시어 서로 돕고 존경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도록 계시했다. 여기서 존귀한 자들 뿐 아니라 낮고 천한 자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것은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세상의 종교, 종족, 신분, 권력, 재물, 학식을 떠나 인간 본연의 가치를 존경하고 사랑하라는 것으로 이해함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욕망과 권력과 부가 종교를 사유화하여 종교를 권력화 내지 사업화로 돈과 명예와 연결을 지었다. 신의 이름으로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하에 막대한 재정을 끌어드려 종교를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도록 했다. 종교를 장악한 성직자와 세상 권력을 장악한 권력이 결탁해 역사적으로 거룩한 처소 건축을 위해 신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재정으로 대 성당을 건축하였으며, 이를 통해 종교권력의 정점을 이루었었다. 이는 중세 시대가 종교와 세속의 결탁의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도 유사한 사례가 있음이 안타깝다.

현대 기독교계에 이러한 잘못된 전통이 스며들어 천주교 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종교가 사회와 결합해 종교 사업이 번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지금 교회나 불교의 사찰이나 기타 이단 종파들도 우후죽순처럼 세속화의 절정을 이루는 중이다. 종교가 종교인들의 내면의 정화와 내세를 위하는 것 보다는 신자들의 수와 모이는 건물의 고급화를 통해 교세를 크게 부흥 하려고 하는 전략은 세속의 기업들의 발전 모델을 차입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본래 종교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종교는 사회인들을 위해 종교 사업을 경영하는 이윤추구의 기업이 아니다. 그리고 신이 거주한다고 신전을 위해 거금을 사용하는 것은 본래 의미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한번 둘러보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며, 치료약이 없어 생명의 끈이 촌각에 달린 병든 어린이와 생명 부지를 위해 하루 한 끼의 양식을 걱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절대 빈곤층 제삼세계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사상과 이념의 충돌과 내전으로 살 곳이 없어진 이주민들의 수는 짐작하기도 힘들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과연 종교가 사업처럼 변질 된 것 타당할지 하나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금년 한 해는 세상에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였으면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상의 종교가 사업으로 변질 되었다고 기독교도 따라가서야 쓰겠는가? 기독교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세워진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한 생명 구원을 성공으로 하는 것보다 모이는 집인 건물의 크기와 거기에 모인 신자들의 수로 성공의 척도를 삼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회와는 다른 모습이다. 기독교는 세상에 구원을 사고파는 사업이 아닌데 실제는 그렇지 않음이 이해가 어렵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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