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목사
 우리나라의 성은 약 270성이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의 20-44배인 5.600-11.969성이고, 일본은 우리의 무려 488배인 13만2천성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최초의 씨(시조)를 성으로 하여 본관으로 분화한 성씨제에 있어서 한 단위의 성씨 집단은 곧 특정한 종족집단을 이루고, 최초의 시조(씨)를 그 후손들이 고수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효를 강조하였던 공자가 동이족과 함께 살고 싶어했던 것은 성씨제에서 비롯된 동이족의 ‘효’사상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은나라 이래의 씨족단체가 계속됨에 따라 성은 최초의 씨(시조)로 한정한 반면, 중국은 씨족에서 개별적인 가부장제로 전환됨에 따라 성 수가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천무천왕은 동왕 13년(685)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망명씨족들의 씨족분규를 근절하기 위해 모든 성을 팔색성으로 통폐합하여 성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대화가 시작된 명치유신 이후, 호적법의 시행으로 국민전체가 성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헌청의 호적관리들이 주민들의 성명을 임의로 적당히 작명해 주었다. 시조도 없고, 본관도 없는 서양식의 창씨가 무려 13만개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천상황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성씨제는 중국의 성씨제에 선행한 은주시대의 전통이었다. 우리의 고유 관습이던 난생신화, 백의 습속, 폭음관습 및 순장도 등은 은나라 때부터의 전통이었다. 은왕조는 원래 동이계 종족이라고 할 만큼, 동이족은 은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신화적인 면은 그대로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사대성을 벗어난 전설이어야 하는 것이다. 황당한 중국의 설화를 따르지 않는 우리의 성씨는 그래도 주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찾는 것이 바로 성씨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상대방의 성씨와 가문을 보는 이유도, 성씨의 정체성을 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가계론적인 입장에서, 성씨는 모두 한자어이기에 중국으로부터 한자가 수입된 이후부터 지어졌다(시작).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장수왕시대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했고, 삼국시대이후 고려때 문종(AD 1055)때부터 성씨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총 270성이 있다. 그 중에 십대성씨를 보면, 김씨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은 이씨이다. 3번째는 박씨, 최씨, 정씨, 강씨, 조씨, 윤씨, 장씨, 임씨 순이며, 단 1명인 성씨도 있다. 무씨, 저씨, 소봉씨, 강전씨, 장곡씨, 초씨 등이 바로 단 1명뿐인 성씨이다.

 최근 우리나라로 귀환한 러시아의 프로축구 선수 골기퍼인 ‘시리체프’는 ‘신의 손’이란 이름이 붙여지고, 경기도 구리에 산다고 해서 ‘구리 신’이라고 본관을 정했다. 우리나라 성씨들의 본관과 성은, 성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준다. 때문에 같은 성씨끼리의 친근함과 우애를 갖는 것은 물론, 같은 혈족을 내세운다. 여기에는 다른 성씨가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씨족간에 다툼이 잦았으며, 근친간의 혼인을 삼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혈족이 강하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같은 시골의 작은 마을은 같은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사단법인 한민족세계선교훈련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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