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1938년 9월9일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함으로 한국교회는, 씻을 수 없는 범죄를 하나님 앞에 저질렀다.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신앙의 자유와 신앙의 양심을 유린당했다.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13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3.1만세운동 102주년에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배신한 배교행위이다. 장로교 평양노회는 1938년 2월9일 최초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뒤이어 동년 9월9일 장로교 제27회총회가 개회될 때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일본 국가주의에 의해 유린당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목회자 대부분은 여기에 항거하기는커녕, 신사참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총독부는 친일기관지인 ‘평양기독교친목회’가 제공하는 정보와 건의에 따라 전국장로교가 신사참배를 시행토록 하기 위해 기독교친목회가 꾸민 각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대표를 불러 신사참배 결행 안을 제안, 동의, 제창토록 하는 각본을 꾸몄다. 그리고 내약을 받았다. 1백여명의 고위경관과 수십 명의 무술경관 포위 속에서 시작된 장로교 제27회 총회는 서기의 성명서 낭독과 친목회원의 신사참배 즉시 실행의 긴급동의로 신사참배가 결의됐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한 선교사들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평양노회장 박응률은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 32명을 대표해서 “신사참배는 일본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성명서를 제출하고, 평서, 안악노회 노회원들의 제청을 받아냈다. 블레어를 비롯한 황해노회 장흥진, 빌 등의 선교사는 장로교 헌법에 위배된다며, 반대 결의문을 총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일경의 압력에 의해서 상정조차 못했다. 이날 부회장 김창길의 안내로 평양신사를 참배했다. 감리교는 이에 앞서 9월3일 총리사 양주삼의 이름으로 신사참배 결행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감리교는 천주교회와 함께 어떠한 저항도 없이 일제에 자진 굴복했다. 여기에서 한발 더나가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에 보조를 맞춰 내선교도 일체라는 명분을 내걸고, 기독교 내선일체, 황국신민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하나님께 배교의 잘못을 범했다. 그리고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송건호 <한국현대사> 신학연구소) 이는 곧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는 일인들도 참여했다. 동연합회는 교파주의에 만연되어 있던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다.

이 연합회에 솔선해서 참여한 한국측 인물은 정춘수를 비롯하여 김우현, 차재명, 구자옥,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 윤치호, 이명직, 김활란, 신흥우, 오경선, 유옥겸, 이동욱, 함태영, 황종진 등이다. 또한 교회지도자들은 ‘정신연성소’에서 정신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정신교육을 받은 후, 전국을 돌며,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밖에도 김활란은 애국여자단을 조직,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신대로 나갈 것을 강연하고 다녔으며, 정춘수를 비롯한 기독교지도자들은 청년들을 향해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연했다. 또 이들은 교회의 종을 떼어 전쟁물자로 내놓았으며, 일본군 전쟁 물자를 위해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을 아낌없이 내 놓았다. 지도자들 중 개인적으로 항공기를 헌납한 인사도 있었다.

햇빛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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