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3.1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에 대해 한국교회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거대문화와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다윗문화에 매몰된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형태로는 한국교회가 역사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없다.

3.1운동의 주체는 기독학생, 기독여성, 기독농민, 백정, 기생, 걸인 등 기층민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들을 몰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영미선교사들과는 무관하게 진행됐다. 한민족 속에 작게나마 싹튼 민족의식이 폭발한 것이 바로 3.1만세운동이다. 3.1만세운동은 한국교회가 중심이 된 민족운동이며, 항일운동이고, 독립운동이며, 비폭력 평화운동이다.

친미적인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투쟁이 있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국제적 상황에 밝은 몽양 여운형 선생은 김규식 선생 등을 파리강화조약에 비밀리 파견, 조선의 독립을 3월 1일을 기해 국내외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광수를 일본에 보내 2.8독립선언을 이끌어 냈다. 한국교회는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2.8독립선언문은 33인을 자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학생들은 국내의 지식인을 믿지 않았다. 학생들은 3.1만세운동을 33인과는 별도로 4월 1일 서울역에서 일으켰다.

이 거사에 참여한 학생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교회의 조직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기독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숭의학교의 송죽회가 그 대표적인 조직이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에 대한 일본의 만행은 잊을 레야 잊을 수가 없다. 3.1만세운동 1년 동안 한국교회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의 한국침략과 지배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선교사들은 앞장서서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인들이 독립운동과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했다.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했다. 이는 많은 기독교 지식인들이 1920년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빌미를 제공했다. 1920년은 조선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남산에 일본 신궁이 세워졌고, 또 하나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먼저 주창되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영미선교사들이 국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결국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의 불의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토의 식민정책과 맞아 떨어져 일본의 한국침략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말한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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