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도 없다

사순절 기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생명의 부활을 맞볼 수 없다. 즉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의 모태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기쁨에 참여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실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지 않은가.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국민 모두는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묻고 계시다. 자영업자의 아우성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는데, 매일 죽임당하는 노동자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쿠데타로 미얀마 국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국경을 넘는 난민들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죄악의 한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왜 기도 할 때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들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활에 참여 할 수 없다. 굴절된 역사, 죄악의 역사를 무너트리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 새 역사는 없다. 죄악의 역사를 무너트려야만 새 역사가 잉태한다. 하나님나라를 실현 할 수 있다. 이제라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죄악에 대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사순절을 보내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경제·문화·외교 등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는 대한민국을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갈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노동자, 군부 쿠데타로 죽임을 당하는 이웃나라 국민의 아우성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아한 귀를 가져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나. 코로나19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을 외면했다. 모두가 자기 안에 갇혀 자기만 살겠다고 아우성쳤다. 교회는 대면예배와 비대면 예배로 갈려 갈등과 분열을 일삼았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며,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사이에서 교회발 코로나19 확진자도 급증했다. 교회는 공공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모두가 근본주의에 갇혀 있었다. 강대국의 권력을 섬기며, 곤궁한 민족의 아픔을 몰각했다. 혼자만 구원받겠다고 몸부림쳤다.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다. 오히려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변호하지 않았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일부 교단과 교회가 작은 교회와 함께하겠다며, 임대료 및 방역물품 지원, 가난한 이웃에게 방역물품과 생계비 지원,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어려움을 겪은 대구시민을 지원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여!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들아가라


자기분열을 치유하고, 인류의 평화(샬롬)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자
고난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

이와 같이 코로나19로 곤궁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헌데 그리스도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노동자와 격무에 시달리는 택배노동자, 굴절된 역사 속에서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의 아픔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지 하는 일본군 정신대 할머니,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노숙자들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이제 자문해야 한다.

일본의 우경화, 경제보복,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는데, 강대국 권력에 만취된 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소녀상 앞에서 일본 아베에게 사죄하는 민족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이들이 3.1만세운동과 8.15광복절에 앞장서서 애국자인척 했다는데 참담하다. 한마디로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고난당한 한민족의 아픔을 잊었다. 자기 안에 갇혀 한민족 역사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삶의 현장이었다. 이들이 있는 곳에 가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된 나머지 기득권자가 되었다. 또한 이들을 외면하고, ‘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예수 믿고 구원 예수의 샬롬을 실현하자 받으라”는 싸구려 복음만을 선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지적에 무엇으로 변명 할 것인가. 이것은 예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니다.

예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 불구자, 이방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래서 깨어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매우 미약하다.

현재 우리가운데 있는 메시아의 표상은 패배자의 모습, 초라기 그지없다. 다윗은 초라한 곳에 계신 하나님을 색각하고, 성전건축을 계획했다. 하나님은 단호했다.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성전을 지어달라고 했느냐”(삼하 7장1-9절)고 책망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욕심과 만용을 위해서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겸손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왕으로 세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들에서 노숙하던 다윗에게 지금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위해 절제하고 겸손하라고 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는 자기의 뜻을 관철하고, 영광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장차 오실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창과 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샬롬(평화)을 실현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며, 승리하신 분이다. 성서의 말씀,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힘이다. 성서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한 현대교회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을 교회당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쓴다. 이제 교회의 사이즈는 권력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향해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교회를 지어달라고 했느냐”고 묻고 계시다.

흔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도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기독교역사를 보면, 교회가 힘을 가졌을 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교회는 나약 할 때 세상 속에서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이 되었다.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왕조 밑에서 고난당하던 한민족에게 빛이 되었다. 소금의 맛도 냈다. 이 때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이 교회로 몰려 왔다. 이들이 민족의 고난을 가슴에 품고, 3.1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한국교회는 해방과 6.25한국전쟁, 60-70년대 경제부흥기를 거치면서 크게 부흥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억압받던 백성, 전쟁으로 지친 백성, 노동현장서 고난당하는 노동자들의 삶 한 가운데로 들어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의 맛을 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 부자가 된 한국교회, 근본주의 신학에 갇힌 한국교회, 고난당하는 이웃교회를 외면한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초심신앙을 잃어버렸다. 모두가 겸손이 바로 권력이며, 힘이 되고, 교회가 부흥한다는 사실을 잃어버렸다. 사실 한국교회는 1990년을 정점으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고 있다. 이제 교회는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황서 코로나19 이후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교회마다 코로나19 이후 교인 50% 줄어들 것이라고 걱정한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한 교회의 이 같은 걱정은 당연하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 교회를 세우자고 주문한다. 그리고 성전 예수를 밖으로 불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가 선교초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번 교회를 떠난 교인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교회를 떠난 교인 중 일부는 “성서에서 이탈한 교회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 일부 교인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다”고 말하면서, 교회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즉 가나안 교인으로 남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잊은 결과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모두가 잘나서 분열과 갈등을 일삼는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이웃가운데서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선교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교회는 꾸준히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내안에 헤어나지를 못하는 교회,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교회, 근본주의에 갇혀 강대국의 권력을 섬기는 교회, 이웃교회와 함께 하지 못하는 교회는 한마디로 희망 없다. 이들 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만연해 다툼과 소송을 벌이며,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성령을 망각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자

분열과 갈등이 만연된 한국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절대 하나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분열과 갈등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고 교육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만큼이나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며,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존재는 무의미 하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것은 우리 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 아니 그리스도인 안에 그리스도가 있을 때 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불우한 이웃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희생 할 줄 안다. 고린도전서 12장 12-13절에 물은 다투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만물을 소생시킨다고 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1)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성에 생수가 솟아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른다고 했다. 유대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스가랴 14장 8-11절) 또한 이는 새로운 질서의 발원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심이 된다. 스가랴는 세계 모든 민족이 평화를 이루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다. 또한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독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동지애로 뭉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세계 모든 민족의 구원을 소망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세계민족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하나 되기를 기도했다. 헌데 영미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배타성과 종교성이 매우 강하다. 교리와 원리주의에 빠져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성령을 내세워 끼리끼리 모여 싸우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다. 내안에 성령이 없는 결과이며, 십자가의 신앙이 실종된 결과이다. 모두가 파멸 할 수밖에 없다. 나 먼저 고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 없다. 나 먼저 고쳐야 한다. 자기 안에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가 있고,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은 자기분열을 치유하고, 인류의 평화(샬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언약한 자를 치유하는 교회,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단된 조국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2021년 사순절을 맞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남북한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길로 갈 수 있다. 하나님나라운동은 나를 개방해 너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너를 개방해 나를 받아 드리는 것이다. 교회도 성전 예수, 시멘트 속에 갇힌 예수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 인류구원을 위해 일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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