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사람을 평가할 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성실’하냐”고, “사랑이 있느냐”고 묻는다. 인간은 누구나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성실하게 산다는 것처럼 어렵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모두는 죄인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대제사장과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에게 참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일깨워 주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4절)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박물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매일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박물관의 바닥을 청소했다. 청년은 바닥을 닦으며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직장상관은 물었다.

“아니,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굳이 바닥 청소까지 할 필 요가 있는가?”

그러자 청년(靑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곳은 그냥 바닥이 아니에요. 박물관이잖아요.”

그의 성실함을 알아본 박물관측은 그를 박물관의 정식직원으로 채용했다. 그후 그는 알래스카 등을 찾아다니며, 고래 등 포유동물에 대해서 연구했다. 몇년 후, 그 청년은 <성실>함을 인정 받았고, 권위있는 고고학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미국 뉴욕에 위치한 자연사박물관 관장에 올랐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탐험가로 알려진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박사이다.

이후 앤드루스 박사의 일대기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지금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있든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는 자는 매순간 기쁘고, 이웃을 생각 할 줄 안다. 이들에게는 가식이 없다. 거짓이 없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열어 상대를 받아드리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 할 줄 안다. 엔드루스 박사는 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쾌적한 환경 속에서 관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이 밟고 지나가는 밑바닥 정소를 자처한 것이다. 앤드루스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저명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박물관 관장이 되었다. 성서는 “겸손하고, 성실하며, 이웃을 내몸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큰 상급이 크다”고 교훈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자리에 있던지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면 높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교육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셨다.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영광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셨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은 현장’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소외된 사람, 하루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노동자, 정신병자, 장애인 등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스스로 낮아 지신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헌데 오늘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일부 목회자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교회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부자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닌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자문해야 한다. 인간은 지혜가 부족해서 일에 있어 실패하는 경우가 없다.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인간은 성실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항상 기쁘다. 생명과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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