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라는 말씀을 새기며 지금 하는 말이 저주. 비난 등을 하기 위해 말의 본질, 성격, 의미 등을 변개, 왜곡 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살펴보고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1729-1797) “악의 승리를 보장하는 유일한 조건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성경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 4).”라고 증거 함을 되새겨 본다.

성경에는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이 거론된다. 그는 ‘아르테미스’라는 우상 신을 만들어 팔아 부를 축적해 오던 사람이다. 그는 직원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배를 더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는 등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자신의 수익의 원천이 없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 직원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르테미스’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행 19:25-27 참조)고 외친다. 과연 그의 이방 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배를 채우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까? 거짓이란 것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판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평화나 경제 등을 주창하며 합리적인 거짓에 의한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고 있지 않은가?

‘아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18년 노벨상 수상 시에 “폭력은 저절로 양산되지 않는다. 폭력은 거짓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는다. 폭력과 거짓은 깊고 자연스럽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폭력은 거짓으로 적절히 위장되고, 거짓은 폭력에 의해 유지된다.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거짓을 원리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중략) - 용기 있는 시민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행동은 거짓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이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지배하더라도 나를 통해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오스 기니스 저, 고통 앞에서다) 고 연설을 했다.

잠언 12:17-19에는 “진리(眞理)를 말하는 자(者)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證人)은 궤휼(詭譎)을 말하느니라 혹(或)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智慧)로운 자(者)의 혀는 양약(良藥) 같으니라 진실(眞實)한 입술은 영원(永遠)히 보존(保存)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고 증거 한다. 따라서 거짓이란 말의 본질을 왜곡, 변개, 저주 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거짓에 의한 악이 판을 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에 동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말 합니다(쉬운성경 고후 2:1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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