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이런 편지와 보고를 받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의사 존 헤론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부에서는 그 때까지 다른 지원자가 없었기에 그를 “장로교파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1884년 일본에 도착하여 준비하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 땅에 들어 왔다.

1884년 6월 6일, 조선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요셉 하스(Joseph Hass)에게 편지를 보냈다. 코리아에 들어가 있는 외국 거류민들이 어느 만큼 의사를 필요로 하는지 알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뜻밖에도 요셉 하스의 답장은 긍정적이었다. 지금 조선의 의료형편은 원주민인 조선 사람도 급하게 서양의술을 요청하고 있지만, 이미 코리아에 들어가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서양병원의 설립이 한시가 급하다는 내용이었다.
알렌은 뉴욕에 있는 선교 본부에 당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F. F. Ellinwood) 목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1884년 6월 8일, 다음과 같은 취지의 간청문을 보냈다. “나의 코리아 입국 계획의 승인 여부를 전보로 알려 주십시오. 만일 본부에서 나의 계획을 수락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 자격으로라도 코리아에 입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 본부에서는 이미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목사의 호소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884년 7월 22일, 미국 선교 본부는 선교부의 사업으로 코리아에 입국해도 좋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알렌은 즉각 주한 미국 공사관에도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미국 공사관에서 알렌에게 보내온 답신에는 단단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어떤 경우에라도 선교사라는 것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런 조건으로라도 코리아에 오고 싶다면 입국하십시오.” 알렌은 우선 입국해 놓고 보아야 한다는 판단 아래 그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알렌은 1884년 9월 14일 상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9월 20일 제물포에 닿았고, 이틀 후에는 서울에 들어와서 미국 공사관과 그 외 서양공관의 공의로 임명되었으나,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이 선교사임을 감히 밝히지 못했다. 알렌의 아내 프란시스 메신저는 조선입국을 불안해하며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혼자의 몸으로 먼저 조선에 오게 된다. 그러나 일련의 이런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히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파송주체이고, 알렌의 신분은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서 공사관 공의를 받아들이도록 결정된 것이었다.

7. 무디와 미국의 선교운동

미국의 세계 선교운동은 1861년부터 무려 4년 동안에 걸쳐서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는 문제를 놓고 격돌했던 “남북 전쟁”이라는 비극이 종결된 이후에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우리는 알렌의 파송 배경 속에는 무디의 부흥운동과 선교적 노력이 있었음에 대해서 주목하여야 한다. 조선반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주변의 준비와 사전 노력이 얼마나 많았던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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