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8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무디와 생키의 신앙부흥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무디가 창립하는데 도움을 준 대학생 자원 헌신 운동은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의 급우인 새무얼 모펫과 윌리엄 베어드도 많은 학생자운운동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들 학급에서 함께 공부하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서까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무한한 헌신을 다짐하였다.

그 한 학급에서 4명이 한국에 왔고, 다른 사람들은 중국 인도 일본으로 갔다. 신학교 뿐만 아니라 교회들도 이 운동의 강력한 흐름에 사로잡혔다”

무디의 주변에 모인 젊은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은 선교열정을 품고 자신들의 영화로운 삶을 포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부름받은 젊은이들을 파송할 준비를 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1886년부터 무디가 구체적인 훈련을 시작한 “대학생 자원운동”에는 162개 대학교에서 2,106명이 선교사로 작정하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무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활약한 마포삼열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시카고에서 기도에 전념하던 젊은이들은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선교적 삶을 다짐했는데, 무디와 함께 열심히 기도하던 젊은이가 바로 마포삼열이었다. 그 밖에도 이루다 셀 수 없이 많은 일군들이 세계를 향해서 달려나갔는데, 한국으로 들어온 분들은 다음과 같다; Sameul A. Moffet (마포삼열), Daniel L. Gifford, William M. Baird, Sr. (방위량), Graham Lee (이길함), William L. Swallen(소안론), S. F. Moore (무어), James E. Adams(아담스), Cyrill Ross(로쓰), Charles Bernheisel (번하설), William M. Blair (배위량), William M. Barrett, Alexander A. Pieters, Carl E. Kearns, 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등이다. 카나다 뱅쿠버에서 무디의 격려와 기도를 받고, 한국에 들어온 게일 (James Gale) 선교사도 초기에 성경번역과 서울 연동 교회 설립 등 큰 활약을 했다.

8. 알렌의 탁월한 의료사역과 민영익의 치유

알렌 의사의 초기 간접 선교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모든 후배 선교사들이 이해하고 존중했는데, 그의 탁월한 인간관계로 인해서 훗날 개신교 초기 선교사역은 순탄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알렌을 준비시켜 놓으셨다. 그는 구한말의 역사가 바뀌는 분수령에 해당하는 날에 예비된 일군으로 나서게 되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서 개화파들이 미국을 방문했던 일을 상기하게 된다. 1882년 말과 1883년 1월, 미국과 조선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5월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한성에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알렌의 후견인 역학을 잘 감당했다. 그 해 7월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로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청나라의 세력이 너무나 커질 것을 염려하여 이들을 견제한다는 뜻에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과 미국 사이의 상호조약 체결은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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