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목사
새벽기도의 최초 현장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찾았다. 나는 2013년 5월 9일, 총신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회 세미나에서 한국에 개혁신학이 어떻게 심어졌는가를 연구하여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에서의 개혁신학, 그 근원과 초기정착 과정”이라는 글을 발표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읽던 중에, 한국교회 최초의 새벽기도회 소식을 “코리아 미션 필드” (1909년 11월호)에서 직접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상세히 소개한 글을 접하게 되었다. 최초 새벽기도회의 감격을 전하여 준 사람은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이면서 마포삼열 (새무얼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에서 사역하던 스왈론 선교사였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09년,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은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되었다고 느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열정이 감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2년 여 전, 1907년 1월 15일부터 일어난 평양 대 부흥운동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죄를 회개하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였었다. 가슴을 쥐어짜면서 통회 자복하던 놀라운 현장을 가장 감동적으로 체험한 분이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 평양 대 부흥운동은 한국의 모든 교회를 감동시켰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앞 다투어서 성령의 불길이 붙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는 차츰 마음이 냉랭해지고 말았다.

나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함께 한 길선주 목사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근엄한 노인을 발견한다. 길선주 목사는 항상 삿갓을 쓰고, 흰 도포를 차려입은 점잖은 선비의 모습이다. 그의 이미지는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그리워하였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는 출석교인이 약 2-3천명에 도달할 정도로 대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져 버렸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렸다. 장로님 한 분과 함께 둘이서 열심히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두어 달 동안 기도하는 중에 소문이 퍼져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예 새벽 4시 30분에 모두 모이라는 종을 쳤다. 그러자 무려 7백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다. 매일 이른 새벽 올려지는 기도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새 힘을 얻었고, 성령의 역사는 지속되었다.

선교사들은 즉각 회합을 가졌다. 이 새벽기도회를 전도와 선교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더구나 스왈론 선교사는 “여러분들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으면, 길선주 목사님이 하고 있는 이 새벽기도의 방법을 채택하시오.”라고 권고하였다.

한국의 새벽기도는 이때부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그냥 하는 기도의 습관이 아니었다. 생명이 충만한 현장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전도의 열심이 일어나는 부흥의 시발점이었다. 무관심과 냉랭함을 씻어버리는 치유와 회개의 역사를 일으켰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새벽기도 부흥은 마침내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바로 다음 해 1910년, “백만 명 구령운동”을 구호로 내세우고 대대적인 전도운동에 열정을 다 바쳤다. 일제하에서 나라를 빼앗기면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희망을 찾게 되었다.

은혜는 지속되어야 하고, 심령의 부흥도 계속되어야 한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은혜를 체험하였지만, 지속적으로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양국군인들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피바다가 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강제합병을 이루기까지 조선은 무기력한 정치인들로 인해서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러한 신앙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간구를 올린 결과이다. 그리고 누군가 찾아와 복음의 말씀을 전해 주어서 내게 전파된 것이다(롬 10:17). 이 한국 땅에서 내가 교회를 통해서 배우고 터득한 믿음의 가르침들의 기초에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담겨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조선시대에 척박한 땅을 향해서 찾아온 초기 선교사님들의 노고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국에 전해진 장로교회의 신학이 어떤 뿌리에서 나온 것인가를 조사하면서 놀랍게도 내가 알던 것 보다 더 큰 수고와 희생이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땅을 찾아와 복음을 전해준 수백 명의 초기 선교사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나라에서도 출중한 엘리트들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신앙은 그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조선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이 가르쳐주면서 풀어준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는 중요한 가르침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물려준 것이다.

우리 한국에는 1884년 복음이 들어왔는데, 피로 물들이는 민족사의 비극들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그 후 십여 년 동안은 암흑기였다.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 조선은 친일파와 수구파로 갈려서 조정에서 쟁투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흔들고 있을 때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려는 친일파가 득세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는 일본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함대기술과 우수한 무기를 앞세워서 이겼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한 것은 조선의 불쌍한 시민들이었다.

일제하에서 풍운에 흔들리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인 1901년 평양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신학반이 시작되었고, 차츰 신학교 체제로 발전되었다. 시카고의 거부 맥코믹 여사가 거금을 보내주어서 학교를 지었고, 이 학교를 통해서 3백여 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서 1938년에 문을 닫았다. 그 때까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심히 미약했지만, 열심히 개혁신앙을 남겨준 선교사들이 있었다. 초기 교육을 잘 받은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등이 남긴 순수한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은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진 성경적 신앙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신앙의 초석을 놓기까지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 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면서, 때로는 무료하고 한심스럽게 갈고 닦아야만 했다. 그는 또 사십 년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야만 모세 오경과 같은 놀라운 책이 나오는 것이다. 신앙은 때로 가족도 없이 야곱이나 요셉처럼 고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정금같이 빚어지기도 한다. 그저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과 세월 속에서 되새기고 또 반복하면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한층, 한층 다져지는 것이다. 그 은혜가 오늘도 새벽기도회에 함께 하고 있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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