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목사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이자, 유일한 구원의 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자들이 결정하고 판단하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니다.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다 결정하고 판단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 성취하고 완성하고 계획하신 대로 의존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겸손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대속의 피 흘림과 구원의 새 생명을 회복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기독교의 구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선행이나 공로를 쌓으려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 잘 못 가르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도 역시 왜곡된 지침을 주고 있다. 기독교는 사람이 노력하여 성취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을 은혜로 받아서 값없이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2,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도리를 압축한 가르침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이나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용서와 회개와 신뢰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냥 구경하듯이 먼 산을 바라보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과 눈물로 자신을 대신해서 죽으신 분을 향해서 회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하느냐, 어디서 어떻게 노력하느냐, 얼마나 성경을 읽어야 하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나의 종교적 노력이나, 선행이나, 업적이나, 봉사의 열매나, 전도의 결과가 아니다. 특히 나의 믿음이 작동하여서, 내가 결단하고 판단하여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은혜로, 선하신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것이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중생하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풀이해 준 구약성경의 실례(민21:5, 8-9)

먼저 민수기21:5을 보면, 애굽을 출발했던 출애굽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운 직선도로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에돔 땅에 거하는 자들이 허용치 않아서,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즉각 인본주의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신앙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들의 이러한 불신앙과 불평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도전하는 중대한 죄악이었다. 하나님은 무한대한 사랑의 아버지이시지만, 죄와 더불어 타협하지 않으신다. 죄는 심판을 몰고 왔고,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그 결과를 물으신다.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서 원망과 시비를 일삼는 자들을 물어 죽게 하였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죽어갔다. 그러나 모세가 나서서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중보자 예수님의 사역을 하였고,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민수기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씀은 이와 같이 비록 한 때는 불평하고 원망하여 죽음을 자초한 자들이라도, 다시 살려주시는 약속, 즉 놋 뱀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 (고후 1:20절)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 계신 주 예수님과 항상 분리되어서 그냥 바라만 본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적극적인 해석과 가르침이 주어졌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그분의 재량에 따라서 맡긴다는 의미이다. 내가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결정하신 바를 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겸손과 순종이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의 낮아짐과 죄 성에 대한 선고와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분과 함께 죽고 살아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였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이다. 롬6:1-14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잘 설명했다. 특히 롬6:4-5절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살아났다. 원래는 불 뱀에 물린 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 그분과 연합하여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에는 오직 성령이 작동하신다. 성령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은 율법의 순종이나, 인간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인해서 용서를 받는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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