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인찬 목사
세상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산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고, 의욕적으로 대항하며, 도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기력을 잃고, 무기력해져서 더욱 약해지는 사람이 있다.

신앙인 중에도 고난을 만나면 헤쳐 나가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모든 원인과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포기가 빨라 신앙이 흔들려 하나님을 멀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오히려 삶의 참 의미와 기쁨을 찾고, 누리는 사람이 있다.

“부모 대(代)에 겪은 고난을 체득(體得)하지 못한 세대는 다시 그 고난을 되풀이 하게 된다.”는 역사의 격언이 있다.

우리들 한국인들은 굉장한 장점들을 많이 가졌으나 바람직스럽지 못한 한 가지 습성이 있다. 그것은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을 통한 교훈을 학습하여 배우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며 쉽게 잊어버린다는 약점이다. 그래서 일제도 잊고, 6.25한국전쟁도 잊으며, 지난날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고픔의 서러움도 쉽게 잊어버리는 좋지 않은 습성을 가졌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난의 유익과 교훈에 대하여 심정을 토록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이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에 유익하였다고 고백한다.

시편 119:67절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을 모르던 시절의 그릇됨을 고난이 인생을 바로 잡아 말씀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고난예찬이다.

고난의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겪기 전에는 세상을 모르고, 자기 잘난 줄만 알아 헛된 인생을 살았었는데, 고난의 낮과 밤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되어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이 올바른 삶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고난을 통해 얻은 교훈과 깨달음 그리고 받은 은혜에 대한 바른 고백이다. 고난과 고통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고난의 교훈을 통한 학습에 관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게 배워야 할 바가 있다. 히브리민족은 우리보다 더 깊고, 길고, 큰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얼을 이어 오며 겪은 고난 속에서 얻은 교훈으로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승화시켜 나간 대표적인 민족이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널리 알려진 무신론자다. 그는 세게 제2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신(神)이 없는 근거의 하나로 “무고한 사람의 고난이 널리 퍼져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강변했다. 억울하게 고난당하고, 끝내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신이 없는 증거라고 들이 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욥기는 까뮈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반론과 함께 확실한 해답을 제공한다.

욥기서야 말로 고난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것이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義人)이 왜 고난을 당하느냐”이다. 고난과 불행 당할 때는 성경 중의 욥기서를 읽는다. 욥기는 극심한 고난과 탄식 중에서 그 고난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 36:15절 말씀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영적 의미를 일러 준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이 말씀은 고난이 우리를 깨우치고, 교훈을 얻게 하는 훈련과정이라고 밝히신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고난은 저주라는 등식을 갖는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바로미터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야 말로 피조물로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첩경이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찾아 나서게 하는 나침반이라고 소개한다.

사도바울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했다는 신앙선언이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기독교에서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고난과 고통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는 시대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와 기독교를 풍요와 부요의 신학으로 개구리삼기를 시도하고 있으나 천천히 달구어지는 가마솥 안에서 삶아지는 줄도 모르고, 춤추고,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우리들임을 알고, 그 미지근함에서 깨어 가마솥 밖으로 튀어 나오라. 

의왕중앙교회.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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