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말씀은 네 마디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바라본 그 시대의 긴박성, 소여성(所與性)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망설이거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며, 내 쪽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의 하나님 나라는 ‘진보’의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삶에 대한 위기의식, 망설임 없는 돌아섬, 혁명적인 결단으로 이해된다. 지금 물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하면 안전한 배를 만들 수 있을지를 궁리하지 않는다. 지금 불타는 집에 앉아서 불에 안전한 집 지을 궁리를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뛰쳐나오는 것.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때의 시급함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어서 제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예전에 김우중 씨의 말처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당신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가꾸는’ 나라이지 혼자서 ‘만드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치’에서 나온다.

제자를 구하는 발걸음은 당연히 인재가 모인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한다. 그곳은 덕망 있는 지도자, 유능한 지식인, 야망을 품은 젊은이가 모인 곳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갈릴리 해변으로 향하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예수께서는 왜 예루살렘에서 제자를 구하지 않고, 세련되지 못한 촌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그리고 당신의 제자로서 헌신과 봉사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다.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섬김을 위해서인 것처럼,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는 것 또한 섬김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식자층은 섬김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섬김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이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 말을 믿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를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간파하신 것이다. 갈릴리 어부들은 달랐다. 그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회개하라’는 요청과 부합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면면을 보면 아무래도 갈릴리 출신이 아닌 예루살렘 출신이 더 많은 것 같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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