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는 미국이 국제적의로 힘의 팽창을 과시하던 당시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이 정부정책에 협조하는 언론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포탄을 퍼붓듯이 비판하면서도 정확한 사실 보도와 냉혹하리만큼 철저한 논평을 해대는 언론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뉴스를 전달할 때 단순히 사건의 결과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는가 하는 사건의 원인에 관심을 갖고 독자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정부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건설적 비판자로서의 도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의 기자들이 진실을 파 해치는데 진력해야 할 의무와 정부의 원활한 공무수행과 국가안보에 대한 제1차적인 중요성에 대한 충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자가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관리를 괴롭히고 국가정책을 위태롭게 한다 할지라도, 결국 사실 보도 자체가 여론의 역동적인 활력소를 준다는 기본원리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직에서 개개인의 직무를 수행하는 공적도 훌륭히 평가되어야 하고 그 직무수행이 만들어내는 정보내용을 취재하여 뉴스를 만드는 기자도 전문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직무수행의 현장에서 기자들의 기사거리가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여 현직관리나 각계인사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했다. 예컨대 ‘레스턴’에 따르면, ‘제임스 코난드’ ‘헨리 리스턴’ ‘노만 아마’ ‘루이스 더글라스’ ‘토마스 핀레터’ 등은 긴 세월 미국 외교정책문제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미국이 존경해야할 인물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이 외교관들이 미국이 고립주의에서 세계의 지도적 열강으로 부각되는 데 공인으로서 많은 공로를 세원T다. 그런데도 이들도 모두 한번쯤은 신문이란 언론매체가 공격하고 비판하는 “신문의 포열(咆列)”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비판으로 체면이 일시적으로 손상될 수 있으나 이 외교관들은 언론의 비판에 관심을 갖고 , 뉴스의 자료가 되는 현장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과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종사자들 사이에 관계를 개선하고 향상시키려는 결의를 다져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언론의 비판대상에 대한 언론의 기능은 결국 선의의 합의에 도달하는 자체적인 치유기능이 있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출처 : 신동아 1987년 1월호 별책부록)

 기독언론은 특정 분야에 무게 중심이 있다 해도,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계는 복음전도에 중심축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언론 매체들도 한결같다. 그 것은 교단소식, 교회소식, 선교소식, 목사님들의 동정, 이단문제, 신학문제 등, 어찌 보면 신학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범주 안에서 맴돌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보도에 있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식이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각 분야에서 생활하는 사회의 한 일원임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 그리해서야 어찌 기독언론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김OO 전 법무장관은 “신앙을 출세에 이용했는지 구치소에서 회개하며 성경을 통독 했다”고 술회 하였다(출처:국민일보). 비단 그 분 뿐이겠는가? 따라서 참으로 기독언론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 일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역기능적, 순기능적 역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되, 오직 정직과 진실에 입각한 안내자의 역할에 충실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정론 직필로 그 방향제시의 선봉에 서는 나팔수와 같은 기독언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13: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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