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믿음이 식으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교회 다니기가 싫어진다. 예배가 지루하다. 헌금이 아깝다. 찬송이 기쁘지 않다. 기도가 입에서만 맴 돈다.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 ‘아멘’은 없고, 불평이 늘어난다. 저 옛날 말라기 선지자 시대 백성들이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저들의 신앙은 불길이 타올랐다. 형편이 어려운 데도 말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쟁적으로 섬기며 봉사했다. 그랬던 이들이 어느 사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순종이 아닌 말대꾸를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병들었거나, 절뚝거리거나, 말라비틀어졌거나, 탈취한 것으로 드렸다. 십일조는 조롱거리였다(말 1:13).

신앙생활이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개개인은 퇴폐한 생활을 일삼았다. 가정은 영적으로 병들었다. 사회적으로는 불의가 만연했다. 백성들은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품꾼의 품삯을 떼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관리들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를 억압했다. 나그네를 등쳐먹는 일이 일상화됐다. 사제들도 다를 바 없었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고, 정의감은 희미해졌다(말 3:5).

선지자가 이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반듯이 온다고 하자 이번에는 심판의 징조가 뭐냐고 대꾸했다. 믿음 없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징조’에 관심을 보인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하늘의 ‘징조’를 보여 달라고.

교회가 살아 있는 증거는 바로 정의가 드러날 때이다. 예배를 뜨겁게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성령 충만한 예배, 축제예배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예배가 뜨겁고, 설교가 유려할지라도 정의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이다. 강단의 설교가 화려하기는 한데 정의가 죽어 있으며 그 시대의 희망도 쇠락한다. 우리는 말라기 시대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한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도 있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