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문학평론가 황현산 씨가 ‘고향의 잣대’라는 산문에서,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선생의 글을 인용한 대목이 있다. 우리는 국권을 남의 손에 넘겨주었던 한말의 위정자들과 관리들이 매우 무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이다. 나름으로 철저히 공부를 했고, 어려운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리들은 능력도 출중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강해서,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열정적으로 조리정연하게 사안을 따질 줄 알았음에도, 일본 측에서 ‘구미 제국의 예를 볼작시면’이라는 한마디 말만 내뱉으면, 우리 관리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주눅이 들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용하던 잣대’가 달라지니 사태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잣대란 사물의 길고 짧고, 높고 낮음의 객관적 이해를 돕는 표준치라는 점에서, 그 시대를 가름하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절대 불변일 것 같은 잣대가 수시로 변할 수 있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말 선비들을 주눅 들게 한 ‘구미제국’이라는 게 절대불변의 잣대가 될 수 없음을 오늘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의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의 잣대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를 향한 비판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 비판의 잣대가 오히려 낡은 것이거나 폐기처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때 교회 성장주의는 목회자의 능력을 가름하고, 교회를 평가하는 잣대였다. 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성장주의는 목회자와 교회를 왜곡시키고, 부패케 하는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의 잣대로 목회자와 교회를 평가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말씀 중심의 교회, 믿음 중심의 교회, 섬김 중심의 교회 등 나름으로 바람직한 교회상을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잣대가 여전히 그렇게 해야 교회가 성장하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니, 그들의 목회자와 교회를 향한 비판은 진부할 수밖에 없다. 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은 자신이 쓰는 잣대를 먼저 살피는 게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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