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호관 목사
첫 추수감사절을 감격스럽게 지킨 사람들은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이었다. 루터의 용기 있는 신앙의 결단으로 교회개혁의 도도한 물결이 유럽대륙을 휩쓸고 있을 즈음에 섬나라 영국에서도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영국의 개혁은 대륙에서 일어난 성경적 개혁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당시 국왕 헨리 8세는 아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는데 이를 반대하는 로마 교황청과 단절을 선언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영국국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개혁신앙의 맛을 본 신앙인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으나 사정은 판이했다.

교회 내에서 여러 모양의 갈등이 진행되는 중에 1534년 국왕을 교회의 머리로 선언하는 소위 수장령(首長令)을 발표하여 교황과 그 권위를 제거하고 스스로 영국국교회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마각을 드러내었다. 이에 성경말씀대로 경건하게 생활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으니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청교도였다.

이들은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무척 고단했다. 더구나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에 직면하여 신앙생활마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자녀들을 올바른 신앙인으로 교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의 꿈을 안고 7년 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스피드웰(speed well)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를 구입했으나 그 배는 장기간의 항해에 적합하지 않아 다른 배를 구입하였으니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호이다. 신앙의 자유에 목이 마른 청교도들은 1620년 9월 16일, 180톤 급의 작은 목선에 102명의 생명을 건 항해 길에 올랐다. 망망대해를 건너는 3,400 킬로미터 뱃길에 도전한 것이다. 너무나 멀고 긴 해로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이도 있었다.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계속된 65일간의 항해는 험난함! 그 자체였다. 11월 9일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에 도착했으나 새로운 개척지의 악조건 때문에 서쪽으로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플리머스 로 옮겨 정착하였다. 거기서 보낸 1년은 악몽 같은 세월이었다. 낮에는 인디언들의 무차별공격을, 밤에는 사나운 맹수들의 위협을 견뎌야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수많은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였다. 일 년 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49명뿐이었다. 그들은 통나무를 베어 예배당부터 짓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인디언과 화친을 맺고 마음씨 착한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추수를 할 수 있었다. 1621년 10월!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며 인디언들에게 배우며 가꾼 생명 같은 곡식을 거둔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으니 첫 감사절 잔치였다.

대개 교회들이 11월을 감사의 달로 정하고 감사교육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면서 그 유래를 청교도들이 인디언들과 함께 드린 감사의 예배에서 찾는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외국산 감사절을 지킬 것이 아니라 추수를 마친 후에 조상님들의 은덕에 감사하는 명절로 지켜온 추석, 한가위를 신토불이 추수감사절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은 청교도들이 지켰고, 미국 사람들이 연중 가장 큰 연휴로 즐기는 그 감사절의 역사를 계승하거나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수장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청교도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첫 열매를 거두고 나서 초실 절을 지키고, 온갖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는 수장절을 지키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를 떠 올리면서 첫 감사절을 지켰으리라!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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