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웰 (Cromwell, Oliver ; 1599.4.25~1658.9.3)은 영국의 정치가로서 탁월한 재능과 함께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인한 성품을 갖춘 인물로 영국내전(청교도혁명)에서 국왕 찰스 1세에 맞선 의회진영의 유력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653~165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지냈다. 호국경으로 있으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쇠퇴의 길에 들어섰던 영국을 재차 유럽 열강의 지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평가는 크게 다르다, 그는 칼뱅주의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종교적 관용(신앙의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가 거둔 승리는 영국과 북아메리카 모두에서 청교도적 신앙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결코 극단적인 청교도가 아니었으며 천성적으로 잔인하지도 무자비한 인물도 아니었다고 한다. 자신의 병사들을 매우 아꼈으며,당젊은 시절에는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데 빠져 있기도 했으나 위엄을 잃지 않은 통치자였다고 한다. 시의 장군들이 의견을 달리했을 때 그들을 심하게 징계하지는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헌신적이었고,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훌륭한 말을 구사하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담배와 술을 즐겼으며, “잉글랜드 역사에 군사독재라는 오점을 남겼다.”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잉글랜드 공화국의 지도자로서 크롬웰은 왕당파의 반(反)혁명운동의 가능성을 두려워한 중산층들의 지지를 받으며 1653년 의회를 해산하여 결국 종신호국경이 되었으며, 성문헌법인 "통치 장전"에 기하여 군사독재를 행하였다. 또한 혁명군 중에서 평등한 보통선거를 요구하고, 아일랜드 침략을 양심적 병역거부로 반대하는 등 진보적 성격을 보이던 수평파를 지도자들을 총살하고 이들의 주장을 묵살(정치는 무지한 민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엘리트주의적인 논리)하고 탄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싹을 억압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 원정 이후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으며 1658년 8월 총애하던 딸 엘리자베스가 암으로 죽은 후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9월 3일 3시에 화이트홀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1월 10일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으며 장례는 13일 뒤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사후 일단 호국경으로서의 권력은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어갔으나, 크롬웰의 군사독재의 반발도 강하여, 장로파가 1660년에 찰스 2세를 국왕으로 맞이하면서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인 1661년 왕을 시해했다는 명목으로 크롬웰은 부관참시(剖棺斬屍) 곧 무덤은 파헤쳐져 그의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1300~1783년에 사형집행 교수대가 있는 장소)에 내 걸렸다. 이후 그의 시신은 그 교수대 아래 매장되었으나, 머리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홀의 꼭대기에 내걸린 채 찰스 2세의 집권말기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그의 추종자들 중 주요 인사들 역시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이일은 상징적으로, 찰스 1세 가 죽은 1월 30일에 시행되었다.(두산대백과사전 참고)

작금에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는 감을 지을 수가 없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나 이해하려는 모습은 조금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크롬웰을 생각해 보게 된다. “칼빈주의” 신앙을 고수한 청교도인...? 아니면 신앙을 가장한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자...? 크롬웰에 대한 역사적 신앙적 평가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뇌에 빠지게 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삶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나악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 되고 있는가?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 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1-12)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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