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서로가 상대의 스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궁금했고, 어느 쪽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신지 궁금했던 것이다.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 세례 요한은 자신을 오실 분의 들러리로 여기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풍속에 의하면, 신랑의 들러리는 마지막까지 신부를 보호하는 사람이다. 마침내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줄 때의 기쁨 말할 수 없고. 세례 요한의 증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메시지가 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요 3:30). 흥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히브리서에서 찾아본다(히 12:18-29). 히브리서는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하면서 시내산은 율법적인 세상의 정상을, 시온산은 복음적인 세상의 정상을 은유한다. 따라서 시내산은 어둠, 두려움, 접근 불가능성인 반면, 시온산은 하늘의 예루살렘, 완성된 교회, 누구에게나 개방된 세상을 함의한다. 다음으로,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를 대조하는데, 아벨의 피는 살해당한 자의 피, 원한을 지닌 피, 복수하는 자의 피다. 예수의 피는 속죄의 피, 화해의 피, 사랑의 피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억울한 피로 인한 복수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사랑과 화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분이다.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는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아벨의 피가 들끓는 세상의 자리에서 돌이켜서 예수의 피로 가꾸는 자리에 들어온 이들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앉아야 할 자리는 권세의 자리도, 성공한 사람의 자리도, 부자들이 모인 자리도 아니다. 그 자리는 정의가 빛을 발하고, 사랑이 넘치는 자리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새 예루살렘이요, 시온산이다. 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부에 예수께서 계신다. 예수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는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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