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철 후보자

1차 모의투표에서 57%인 13000여표 획득 ‘1위’

“나는 다른 공화당원들과 다르지 않다.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공화당이다. 하지만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은 상식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워싱턴에 다시 상식을 가져가고 싶다. 이 나라가 나와 내 가족들에게 좋은 것을 준 것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나라를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미국 조지아주 유진철 연방상원의원 후보의 다부진 포부다. 유진철 후보는 미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 주에서 미국 정치계의 최고위 중 하나인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선전을 펼치고 있다. 오는 5월 20일 치러지는 예비 선거를 앞두고, 동양인 최초의 연방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하루 수 천 마일의 선거유세의 여정도 거뜬히 소화하고 있다.

유진철 후보를 두고 “미국에서 주목을 끄는 한국인이 될 것”이란 반응이 뜨겁다. 이는 꿈과 약속의 기회보다 아무런 보장 없이 미국으로 온 소년 이민자였던 유 후보의 인생 역정도 한 몫 했다.

경상남도 사천이 본적인 유 후보는 6.25전쟁 발발 3년 뒤 휴전한 시점인 1953년 서울 가회동에서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후 1세대인 유 후보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1972년 고등학생 때 미국 조지아주 동쪽에 위치한 인구 20만의 중소도시 오거스타에 정착했다. 낯선 나라로 이민을 와서 버틀러 고등학교에 입학한 유 후보는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윈 딕시 식료품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고등학교 내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유 후보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온 국민이 혼신을 쏟고 있었다”면서, “가난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부모님을 돕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유 후보는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리치몬드 카운티 소방관이 되었고, 동시에 오거스타 대학에 입학해 형사행정 및 응용범죄학을 전공했다. 이 때 다양한 책을 읽고, 지도교수들과 가족들과의 상담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곧바로 기업가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다 폭 넓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 후보는 ROTC에 지원했고, 훈련을 거쳐 미 육군에 입대했다. 군에 입대해서는 항상 잊지 않고 품어온 한국에서 복무하기 위해 주한미군에 지원했다.

유 후보는 “미국 시민권자로서 비록 한국군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한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한국으로 갔다”면서, “미육군 헌병장교로 한국에서 성실하게 복무했으며, 복무 중 평생의 반려자인 조니를 만나 결혼해 1979년 중위로 예편했다”고 말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1984년까지 만 5년 동안 리치몬드 카운티의 경찰관으로 지역사회를 섬겼고, 보다 의미 있는 직업을 찾아 잉여군수물자를 사고 팔던 사우스이스턴 설비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병환을 얻어 쓰러졌고, 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전제로 교회에 다니기로 아내와 약속하게 됐다.

유 후보는 “평생을 불교집안에서 자라온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한 순간에 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면서, “병든 어머니의 간병을 맡겠다는 고마운 아내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 후보의 삶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성도들은 목사에게 교회를 떠날 것을 종용했다. 유 후보는 이 때 “이 문제의 시발점은 목사님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 있다. 내 생각에는 목사님을 떠나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고, 결국 반대편에 섰던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지경에 처했다. 성도들이 교회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나 8개월간 교회의 모든 재정을 자비로 충당하며 교회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더욱이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도 경영난으로 감원바람이 불어 닥쳤다. 유 후보도 감원대상자 명단에 올라 하루아침에 실업자의 신세가 됐다. 그러나 유 후보는 낙담대신 담대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회사의 대표가 찾아와 유 후보에게 같이 일할 것을 요청했고, 회사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열정과 정성에 감복해 회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인수받게 됐다. 유 후보는 1994년 이 회사를 컨티넨탈 밀리터리 서비시스로 사명을 변경하고, 대표의 자리에 올라 최선을 다한 결과, 미군은 물론 이스라엘, 태국 등에서 자사의 장갑차 등을 납품하는 등 크게 성공가도를 달렸다. 현재 이 회사는 무려 60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굴지의 회사로 성장했다.

유 후보는 “이러한 모든 과정 속에서 유 후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부터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역사하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잠시 해고되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셨고, 그 시험에 따른 고난의 시간을 견뎌 마침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회사를 넘겨받아 현재의 자리에 있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유 후보는 지금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27년간 봉사를 해오고 있으며, 한국계 교회에서 10년, 미국인교회에서 17년간 온전히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을 현재까지도 보내고 있다.

유 후보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세대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뉴베리 대학 재단에도 이사로 참여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180여개의 미국 한인회 총수장인 제24대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특히 유 후보는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사업에 중점을 뒀다.

유 후보는 “미국전역에 있는 4만 3천여명의 참전용사들에게 자유의 메달을 증정하는 일을 기획하고, 한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전 미국을 다니며 한 분, 한 분의 가슴에 메달을 달아드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면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파병했고, 3만 6천여명의 미군 병사들이 전사했기에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 후보는 또 “조지아 주 오거스타 시내 한복판에 주 정부와 시를 설득해 한국전쟁 기념탑을 건립했다”면서, “2004년 12월 4일에 준공된 이 기념탑에는 한반도 지도가 새겨져 있고,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란 문구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에 전사한 오거스타 출신 미군장병 85명의 이름과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혀 고초를 겪었던 오거스타 및 인근 조지아주 내 10개 카운티의 미군장병 수백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덧붙였다.
이 공로로 유 후보는 오거스타 시장 공로상, 태국 해병대사령관 공로상, 미국 재향군인회 한국참전용사회 공로상, 이스라엘 보국훈장, 미국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2009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도 수여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유 후보는 자신 있게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사표를 던졌다. 유 후보는 “나는 아메리칸 드림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미국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미래의 자녀들에게 위대한 나라를 지켜서 물려줄 책임이 있다”란 국가적 소명을 위해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현재 다른 후보에 비해 늦게 출마한 유 후보는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2013년 10월에 치러진 조지아 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 1차 모의투표에서 23000여명의 투표인 중 57%인 13000여표를 획득해 1위를 차지했으며, 2차로 12월17일에 실시된 청년 공화당 모의투표에서도 47% 라는 압도적 득표로 1위를 획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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