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한 해가 저물 때마다 못다 한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도 요한이 사셨던 시대도 그랬던 모양이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편지로 쓰기보다 직접 찾아가서 만나고 싶은 마음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없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보다 더 애틋한 정을 지니고 살았다. 서로가 믿음 한 가지로 행복했던 시대이다. 오늘날은 어떨까? 그런 소박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믿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믿음이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믿음 자체보다 믿음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열망이 강하다. 부적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믿음끼리 그리워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믿음끼리 경계한다. 크게 이뤘다는 믿음은 이루지 못한 믿음들을 얕본다. 보여 줄만한 것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무엇인가를 이룬 큰 믿음 앞에서 주눅 든다.

믿음이 믿음을 구박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되새겨볼 게 있다. 예수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꾸한다. 인간의 수많은 요구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거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삶의 끊임없는 요구들을 다 들어주신다면 세상은 폭발할 것이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얻은 모든 것이 선한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시지만, 주님 스스로 포도주가 되신 분이기도 하다.

세상이 항상 소란스럽고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결핍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풍족한 삶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럼에도 믿는 이들이 믿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내면화시키지 않고 단지 수단으로 삼아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데서 세상은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고, 믿음이 인격 안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인격 안에 스며든 믿음이라야 그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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