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다니엘서 이야기다. 유대는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예루살렘성전이 더럽힘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빌론의 수준 높은 문화와 경제에 힘입어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도 했다.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유대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자기도취와 향락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와중에 바빌론은 유대인을 헬라문화에 동화시켜나갔다. 유대의 준수한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황제 곁에 두고 융숭한 대접을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바빌론의 세계화 정책은 오늘날 미국 중심의 세계화 정책 이상으로 치밀했다. 유대인들은 누가 강제하지 않는데도 앞 다퉈 헬라의 선진문화를 수용했으니 말이다. 이런 연유로 히브리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헬라어가 일상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식 이름 대신 헬라식 이름을 즐겨 썼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은 그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바빌론에 의해 선발된 유대 청년은 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 등이다. 이들은 바빌론에 의해 헬라식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바빌론의 세계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바빌론 왕실이 제공하는 포도주와 고기음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고집함은 물론, 황제숭배의 명을 거부하고 풀무불에 던져지는 형벌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학문과 지식이 바빌론의 내로라하는 박사들보다 탁월했기 때문이다.

바빌론에 의한 세계화만이 안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이에 반하는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며 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베드로서신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벧전 4:7)하며 성실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를 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위기들은 물질의 결핍에 있다기보다 정신의 황폐화에 있지 않을까? 물질문명이 약속하는 미래만을 좆다보면 찾아오는 것은 절망이다. 신앙의 위기는 곧바로 삶의 황폐화를 불러들인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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