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영국 왕립학회의 한 과학자가 시골에 사는 친척을 방문했습니다. 친척은 과학자를 만나자마자 자기 옆집에 정신나간 노인이 살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친척에 따르면 그 노인은 아침마다 비눗불이 가득 든 물통을 현관 앞에 들고 나와 어린 아이처럼 대롱으로 비눗방울을 만들고는 비눗방울이 터질 때까지 심각하게 바라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척의 말에 호기심을 갖게 된 과학자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통해 옆집 노인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노인의 행동을 한동안 관찰하던 과학자는 친척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미친 노인이 아니라 유명한 뉴턴 경입니다. 비눗방울을 통해 빛의 반사를 연구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뉴턴(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 1727년 3월 20일) )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빛을 연구하기 위해 해를 몇 시간씩 바라보다가 시력을 잃을 번한 적도 있습니다. 또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해 놓고 정작 자신은 서재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친구들이 식사를 다 하고 간 뒤에 나와서 어질러진 식탁을 보고는 자기도 밥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그러나 뉴턴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는 뉴턴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출처 :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

물론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게 됨으로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은 물론,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그는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의 인생역전의 동기부여는 그가 열렬한 개신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가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브리태니커 참고)

 2014년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어수선한 한해가 될 것이라는 관측들이 많다.그러나 이러할 때 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표의식을 분명히 하고 진리위에 굳게 서 흔들림 없이 복음 전도에 온 정열을 다하는 은혜를 누려야 할 것이다. 어떠한 환경 탓에 밀려서 원망과 불신과 좌절로 인하여, 스스로를 자학하는 결과에 이른다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불화 등의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꿋꿋하게 달릴 수 있었던 뉴턴의 신앙과 열정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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