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 목사
우리 조상들은 쌀을 퍼가지고 가서 옷감과 바꾸었고, 일꾼의 품삯을 콩 몇 되, 보리 몇 말로 치렀다. 사실상 돈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물물교환으로 살 수가 있었다. 감투를 탐내는 시골의 부자가 서울 사는 정승을 한 차례 찾아볼라치면, 소달구지에 제 고장 특산물이 한 바리 싣고, 어쩌다 캐낸 산삼이라도, 한 뿌리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가면 될 일이었다.

돈이 언제부터 우리의 살림에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여간 돈이 오늘날 무서운 위력을 지닌 괴물처럼 판을 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세 살 난 어린이로부터 여 든 살 먹은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입을 가진 사람은 죄다 돈, 돈 하니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된 것만은 확실하다. 돈이 대관절 무언데 이다지도 돈, 돈 하는 것일까?

물론 돈이 있으면 땅도 살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다. 맛 나는 음식이나 화려한 옷, 금은 보석상에 진열된 모든 값진 것들이 다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침저녁 전철이나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는 것이 편한 것이 확실하고, 돈만 있으면 비싼 외제차도 사서 타고 다닐 수 있다. 한마디로 돈만 있으면, 권력도 살 수 있고, 사형수도 빼낼 수 있다.

그러나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호화롭게 생활은 할 수는 있어도,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일은 어렵다. 행복을 돈 주고 샀다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정신적 차원의 기쁨을 물질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나만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는 격려는 더욱 잘못 된 것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한심스런 생각이 이 나라 백성들을 돈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지난 날 ‘잘 살아보자’는 구호아래 열심히 일해서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르게 살아 보자’는 부르짖음이 앞섰어야 했을 것이다. 각자가 단지 잘 사는 것만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분쟁, 시기, 모략, 중상, 부정, 부패와 같은 독버섯이 창궐하는 온상을 구경하는 것은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우선 거짓을 몰아내고 스스로 타고난 능력이나 재간을 십분 발휘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제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순전히 남의 돈만 가지고 재벌도 되고자 꿈꾸는 가운데 사기와 협잡을 일삼는다든가, 뻔히 참새이면서 황새걸음을 걸음으로써 신세를 망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행복은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어야지 물질에 짓눌려 있어서는 안된다.

젊은이들이 돈 몇 푼이라도 더 준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직장을 옮기고 일터를 바꾸는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로 아는 그들만을 나무랄 수 없을 것 같다. 사회적 풍토가 그렇고 많은 사람의 가치관이 그런 터에 어찌 젊은이들만이 올바른 인생관을 지녀 주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는 나라라도 돈이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돈보다 귀한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부강한 국민이 되느니보다는 정의로운 질서 위에 사는 정직한 국민이 되는 것이 백배는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오정성화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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