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교수
5. 보편성의 질적인 측면

개신교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보편성의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관계로 묶여진 행정조직과 교회정치를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심조직에 한가지로 연계되어야만 한다고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사법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는 성경에 위배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교회의 보편성이란 “교황중심주의적인 행정과 정치 조직체라는”의미이며, 그 머리에 위치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회가 중심에 있을 뿐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런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보편성의 원리를 지켜나가고자 할 때에 항상 조심해야할 부분은 교회를 따로 설립하여서 자신들만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파주의와 분리주의적인 이탈현상이다. 기독교를 빙자하여 세워진 이단들은 거의 다 분리주의자들이다. 한국에는 유난히도 많은 분리주의자들이 교회라는 간판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다. 더구나 분리주의자들은 기성 교단과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우월의식을 내세우면서, 외형상 매우 건실하게 보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벗어난 이단들과 분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충만함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을 본받으려 한다. 모든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삶을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한쪽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단이요, 불건전한 사이비 분파주의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외시키지 않았으면, 교회가 어떤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계층이나 소유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인다. 이단과 거짖 복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기준을 정해 놓으셨다. 사람들이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세워질 수 없다.

6. 보편성에 대한 도전들

교회의 보편성은 선물이자 동시에 의무이다. 우리가 보편성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항상 새로운 도전들과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

첫째, 에큐메니즘 운동이 보편성을 지켜줄 것이라는 허상을 걷어야 한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들이 제기되면서 가장 많이 논쟁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교회일치와 연합운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상에 건전한 교회들이나 불건전한 교회들이나 서로 일치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매우 힘들고 여럽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 에큐메니즘 운동이 일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피해를 목격하고서 반성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서로 자주 모이고 연락할 수 없었으나,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보자는 일치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로서 보편성과 정치적인 교단과 교파의 일치운동은 서로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수평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 운동은 수직적인 보편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에큐메니즘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미혹이다. 서로 타협하고, 서로 협상을 거듭하면서 조각난 교회들을 한 테두리에 묶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업적과 성취를 향한 영웅적인 과시욕에서 나온 것이다.

사업 목표처럼 교회의 보편성을 가장 우선해야할 최선의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그 열매로서 교회일치 운동의 열매를 맺으려 할 것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의 운동을 펼쳐야 할때이다. 즉, 모든 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열심히 연합하고 하나되려는 노력을 하면서, 최종의 목표가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치도, 평화도 도모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보편성의 원리 안에 이미 담겨있는 것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편견과 차별을 삼가자

참된 교회는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나 편견을 없애야 한다. 편파적인 안목은 사람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보편성의 원리를 붙잡는 교회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는 단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원리와 본질 면에서 두 개, 세 개, 여러 개로 나뉘어질 수 없다. 교단과 교파로 분열되어 있더라도 본질상 하나일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다 전체 교회에 연계되어서 하나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은 공동체이다.

한국에서 인종적인 차별이나 성별이나 예배 참가자들에게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현대 한국 교회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서 22절에서 교회가 하지 말아야할 일들, 차별에 관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부자들과 고위층들은 건물의 중앙에서 비싼 고급음식을 즐기고, 노예들과 하층 서민들은 밀려나서 문 밖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먹어야 하는 현저한 차별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계급이 엄격하게 존재하던 시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서는 문화가 다른 계층적인 분리가 일상적인 풍경처럼 벌여졌다. 먹는 것부터 서로 달랐지만, 그마저도 차별이랄 것도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호했다.

전세계 어디를 가든지 부자 동네가 따로 있다. 겉으로는 안보이지만, 그 속이 다르다. 소비문화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유명한 회사 제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곳이 따로 있다. 부유층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색다른 곳에서 차별화를 즐기고 살아간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시대이므로, 자유함을 약용해서 각자 자기만 배불리 먹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만 좋은 곳에서 남달리 즐기는 생활을 하는 것도 은밀하게 차별주의를 향유하는 행동일 것이다.

셋째, 분리주의와 분파주의를 경계하자

교회가 특수한 계층에만 귀속된다면, 보편성의 원리를 상실하고 만다. 지금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각종 이단들과 불건전한 사교집단들은 보편성을 던져버리고, 자신들만의 분파주의에 사로잡혀있는 분리주의자들이다. 유대인들의 분리주의와 우월주의는 종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 기독교 이단들과 불건전한 사이비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던지고 자신들의 가르침에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고 있다. 건전한 형제교회들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자랑하는 교리를 내세우면 틀림없이 분리주의자들이다.

교회가 전통과 신앙유산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어떠한 특정한 사건에 근거해서 교파와 교단을 만드는 것도 보편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동참하면 서로 동지로 여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과 가르침 뿐이요, 나머지는 다 헛된 속임수일 뿐이다 (골 2:8).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분파주의자들이다.

넷째, 교회 본질을 벗어난 성장주의와 혼합주의를 분별하자

그리스도 중심의 보편성이 없다고 한다면, 어느 교회라 하더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교회의 보편성과 신앙의 동질성을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미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문제점들이었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무작정 다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신앙을 검토하고, 복음에 입각해서 건전한 검증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보편성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문화적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은 성장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교회 성장학이 가져다 준 치명적인 피해 중에 하나가 혼합주의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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