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성탄절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아기 예수가 낮고 추한 말구유에서 나신 것은 자기를 비우사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엄청난 포기와 희생을 수반한다.

그 이유는 단지 우리와 같이 되시기 위함인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심판받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은 이보다 더 귀한 은혜, 더 큰 사랑, 더 큰 복이 없는 절기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탄절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날로 생각한다. 성탄절의 주인인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고 산타클로스나 징글벨이 주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웃지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주님의 성탄의 의미를 이 세상에 전하고 실천해야 할 교회마저 사회를 향해 높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축제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성탄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가난과 병마의 고통에 갇혀있는 이웃과 기아와 전쟁과 테러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구촌에 선포해야 할 평화의 메시지를 교회가 가로채선 안된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멀쩡한 가장을 하루아침에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시키는 암울한 현실에 대해 교회는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더구나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길까지 끊긴 북한동포에 대해 지금 한국교회는 이 시대에 과연 무엇을 했다고 후세에 기록할지 두렵기만 하다.

지난 1세기동안 쌓아온 한국교회의 사회를 향한 섬김과 나눔, 평화와 희생의 정신은 부흥 성장주의 논리에 가로막혀 존경과 신뢰 대신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의 댓가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값을 한국교회는 오래오래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손을 내밀어 주신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시며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씀하신다. 소외되고 억눌리고 고난당하는 이웃들의 눈물겨운 호소가 들리지 않느냐고 외치신다. 거리에서 울려퍼지는 캐럴송에 묻혀 잘 들리지 않겠지만 조금만 귀 기울여 들어보면, 2천년 전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저들을 섬기고 따뜻하게 품어주라는 주님의 명령이 귀에 쟁쟁하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