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받아
영혼의 주름에 뿌린다.
뜨거운 햇살 받아
젖은 영혼의 주름을 편다.
푸르름 찾아
주름 없는 영혼은
높이 높이 날아 오른다.
기독교는 인간 구성을 이분설과 삼분설로 나눈다. 이분설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한다. 삼분설은 영혼을 다시 영(soul 푸누마)과 정신(sprit. 푸쉬케)로 나눈다. 신학적으로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이분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제목 ‘영혼’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영과, 정신이라는 의미에서 혼을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작품은 주름을 펴는 다림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주름진 옷을 펴기 위해 다림질할 때 먼저 주름을 분무기로 축축하게 만든다. 그러나 1연에서는 분무기를 가랑비로 대치시켜 놓고 있다. 가랑비란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단비를 상징한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인간의 구겨진 모습을 회복가능하다는 것이다. 2연의 ‘뜨거운 햇살’ 도 신적인 강열한 작용을 말한다. 1~2연에 나오는 가랑비와 햇살이 비유하는 의미는 전적으로 신의 은총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에서 주름이 펴진 영혼이 찾는 곳의 푸르름이란 단순한 자연의 색이나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초적인 생명의 본질과 그 생명이 추구하는 목적지인 에덴동산과 같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름진 상태인 죄인이라는 것과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은 성령의 도움과 하나님의 강열한 사역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종교적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본문 안에는 전혀 종교적인 술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을 문학적인 비유와 상징어로 형상화시켰다는 면에서 미학적 수준을 인정한다.
한국 기독교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