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교수
사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오실 수 있으신가? 알아주지도 않고,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냥 묻혀버리고 잊혀지고 만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모든 겸손의 본질이요 원형이다. 예수님의 모든 지상사역에는 항상 겸손하심이 들어있고, 모든 행동과 가르치심에 담겨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을 돌보는 모습 속에 들어있다. 은은히 퍼져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은 낮아질 뿐만 아니라 고귀한 것들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사랑이었다. 이기적인 자들에게 쏟아 주시고 그저 마땅한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포기하신 것이다. 낮아짐이 너무나도 철저하여서 신분이나 성별이나 귀천이 따로 없으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모든 언약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최고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서는 어떻게 움직이시는가를 알려주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출애굽기 3장 8절에서 발견하게 된다.“내가 내려가서”라는 구절이다. 히브리어를 발음으로 옮기면,“야라드”(Yalad, 영어로 하면 descend, come down, go down)인데, 낮아지심의 원리를 확실하게 깨우치게 된다. 모세는“야라드”를 확고하게 깨우치게 된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를 찾아서 내려오신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with us)는 뜻이다. 낮은 자리로 찾아오시는 것이 바로 언약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세에게 보여주신“야라드 원리”(yarad principle), 곧 낮은 자리로 찾아서 오시는 하나님의 행동원리는 구원의 역사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자발적으로 내려오는 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도 우리 수준으로 낮춰주신 방법 중에 하나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려 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춰주신 것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초대 교부시대부터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용어로 “어코메데이션”(수용가능하게 낮춰주심)이라고 풀이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계시하신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명령하고 호령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과 본성에 따라서 내려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있는 낮춰주심과 겸손의 원리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한 결 같이 발견된다.

지식을 많이 가진 대학교수나 박사가 어린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모든 것을 낮춰서 설명해야 한다. 박사의 지식이 없는 어린 아이에게 말이 통하게 되려면, 어려운 낱말이나 비유는 필요 없다. 가장 쉬운 단어로 어린 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설명해야 알아듣는다. 

“야라드 원리”는 창세기 3장 8절에서도 발견된다. 서늘한 날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나고자 내려오셔서 걷는다고 표현되어진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범죄 한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담겨있다.

창세기 22장 11절에서도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러내는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을 보고 계시면서, 먼저 사태를 종결짓고자 찾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출하시고자 함이다 (시 34:7).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처럼 옛 언약에 담긴 “야라드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성경의 원리를 기본적으로 우리가 이해해야만 한다.“야라드 원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 피조물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맺으시는가를 보여주신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야라드의 원리”를 보여주셨다.

이것은 장차 새로운 출애굽을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을“임마누엘”이라 하였다. 임마누엘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죄의 굴레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먼저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오신 것이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상호 소통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 고난당하는 백성들의 상태를 다 파악하고 있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려주신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모세가 해야 할 임무를 알게 하셨다.

모세가 구원자의 임무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앞으로 무엇을 말해야 하며,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 확증을 주셨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한다. 모세를 파송하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이 구분이 하나님의 자존성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계에 속한 분이 아니요, 자연만물에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독립성”과 유일성을 드러낸다. 떨기나무 자체는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하나님의 임재선포의 형식으로 불로 표현한 것이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언약

17세기 영국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장에는 낮춰주심과 언약은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낮춰주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서 먼저“자발적으로”겸손해지셨다 (voluntary condescension).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여 오직 정죄를 당해야 마땅한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맺으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에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성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직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아무런 죄를 범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찾아오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주어졌고, 아담이 순종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담과 낮아지셔서 상호 소통을 하셨다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아담은 창조주에 대해서 관련을 가진 존재로서 책임을 져야만 했었다.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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