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 구원 역사의 기본구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진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에 초점에 두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지위와 존엄성은 매우 고귀한 것이지만, 타락의 비극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내적인 본성에 엄청난 변질이 초래되었다. 인간은 깨트려진 꽃병과 같이 부서지고 말았다.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참된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 있다 (요 9:39).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바를 받아들이는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다. 두 번 째 부류의 사람들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공허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불신자들이다. 영적인 맹인들이다.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과 사이비 유사 기독교에 속한 자들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을 것이다. 1) 첫째 부류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막연하게 짐작하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인생은 어떤 목적도 없으며,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므로 우리가 창조적으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윤리마저도 순간적인 선택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절대 진리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아서 너무나 “비이성적인” 세상만 남게 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의 선택은 기독교의 하나님 대신에 다른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신을 택하여 숭배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과연 어떤 신이 가장 참되고 훌륭한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택한 신이 최고라고 옹호하고 주장할 것이다. 종교를 가졌다고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자기주장에 빠져 버리게 된다. 혹자는 자기의 합리성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성주의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도 결국은 사람 중심의 자율성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결국 신에 대한 결정들이 각자 사람의 생각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고, 사람의 판단에만 의존하게 되고 만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만, 비이성주의나 이성주의나 간에 인간은 피곤하기만 하고 자기 방어적이 되나, 인간은 결코 자율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여서 각자 자기의 주장을 거듭할 뿐이며 계속되는 대립과 논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특히 현대인들은 극심한 개인주의에 빠져있다.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지만, 과연 남보다 엄청난 성취를 했다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남보다 많은 돈이나 높은 명예나 학벌이나 직위를 얻었을 때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지만, 이런 것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성적인 쾌락도 마찬가지여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인생은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수험생처럼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뜻밖에 벌어지는 사고와 죽음 앞에서 절규하는 것이 인간이다. 한층 더 높은 영적인 차원의 관계가 맺어져 있어야만 안심하게 되고, 내적인 여유와 평안함을 갖게 된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오묘한 부분이 많다.

1.1. 창조하신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낙원이요, 이름은 에덴동산이다 (창 2:10). “에덴”이라는 명칭은, 고대 아카디아어에 남아있는데, 고대 근동지방의 대중언어 아람어에는 “열매가 풍성하고, 물이 풍족한 초원” (fruitful, well-watered)이란 뜻으로 통용되었다. 최근에 히브리어 학자들은 “에덴”이라는 단어는 원래 아카디아어 “에딘누” (Edinnu)가 아람어를 거쳐서 히브리어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에덴은 푸른 동산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낙원이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최초 상태는 떼를 지어 노는 동물들과 자라는 식물들이 그들의 창조주께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65:13).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누리게 되었던 축복은 자연적인 풍성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에덴 동산의 축복 중에 핵심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럽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교제의 특권을 누렸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대화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자기계시를 보여주셔서 진리를 맛보았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살던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하는 피조물의 위치를 지켰더라면,  인격적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를 맺고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관계로 맺어져 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사람은 불순종하고 배반하며 약속을 깨트리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생활, 천국생활의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내면적으로 영적인 교통이 있으며, 마치 호흡이 통하고 피가 흘러가므로 영향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의 교통하고 영적으로 교류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재창조의 과정 속에서 모든 만물을 진행하시려는 뜻과 계획을 세우셨고,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준비된 대로 집행하고 있다 (엡 1: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로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계획을 세우셨고, 작정하신 대로 자유롭게 선하심과 은혜를 펼치신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와 작정을 펼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내어 펼치고자 아무 것도 없는 우주 속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고, 최종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명령하셔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지으셨다 (창 1: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